선수 외에는 링 안으로 들어오지 않기
대학교를 다닐 때 새벽에 열심히 영어 학원을 다녔습니다. 종로 시사어학원, 강남 파고다, 압구정동 민병철어학원까지 학교만큼 서울 전역의 학원을 누비며 지냈죠. 토익시험을 보고 주말 특강을 들으러 민병철 어학원에 갔을 때인 것 같아요. 형편없는 기억력이지만, 그때 특별히 어학원의 수장이신 민병철 대표님의 강의를 각 강의실의 텔레비전을 통해 봤었지요. (솔직히 지금은 그때 그 학원이 압구정인지 강남인지도 가물거리긴 합니다.) 영어 강의 중에 특이하게 힉슨 그레이시 (Rickson Gracie, 브라질 이종격투기 선수)의 격투기 영상과 주짓수 하는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마도 그 선수의 패기와 열정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었겠죠. 자신보다 더 거구의 선수들을 놀라울 정도로 날렵하게 재패하는 백전백승의 파이터였는데 격투기에 1도 관심 없던 저에게도 그 모습은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팔각의 작은 링안에서 야수 같은 선수들의 승리를 위한 혈투가 '와' 소리가 나게 멋있었습니다. 한동안 주짓수를 배우고 싶어 알아보았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주짓수를 배울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고 학생이던 저에게는 도복값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싸서 포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길거리 개싸움이 아니고서야 싸움의 규칙은 명료합니다.
저같이 복싱이나 종합격투기 같은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분명한 게임의 룰은
"링 안에서는 선수만 싸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코치나 감독도 종이 울리면 링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링 안에서는 설령 피 흘리고 다리가 꺾여도 다시 종이 울릴 때까지 선수는 오롯이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룰은 링 안에서 만 존재할까요?
청소년 상담을 하다 보면, 1+1으로 부모상담을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은 만 9세에서 만 24세까지 그 범위가 꽤 넓은 편입니다. 아이들을 상담에 맡기는 경우 보통의 부모님은 현재 우리 아이의 상태가 어떻고, 내가 어떻게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지를 가장 궁금해합니다.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족 간의 문제가 있어 오는 경우도 있지만,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이 힘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영유아나 어린이가 아닌 청소년의 경우, 부모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한정적일 수 있습니다. 발달과정상 청소년은 가정보다는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또래관계 안에서 인정받기를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돕는 노력보다는 관계에 해가 되지 않는 것 , 마음에 안 차도 지그시 기다려주는 것이 꽤 효과적일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생활에서 받는 어려움을 부모가 다 막아주고 싸워줄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아이를 건강하게 크게 하지 못합니다. 조금씩 성장할수록 아이들은 부모가 함께 싸워줄 수 없는 그들만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로나 공부일 수도 있고, 친구와의 관계나 이성관계, 정체성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서 부모는 아무리 많이 알고 자녀를 사랑해도 아이의 팔각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죽여 기다리고, 피하고, 맞고 때리기도 하면서 어떤 때는 이기고 어떤 때는 지고, 어떤 때는 머뭇거리면서 자신만 삶의 가치와 룰을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나 성인이 되면 가정이라는 둥지를 어설프게나마 실제 한 발 한 발 떠나 '독립'하게 되겠지요.
물론, 너무 크게 상처를 받아 아이가 더 이상 자신의 링으로 돌아가지 못할 때, 가족은 그 아이가 안전하게 쉬고 회복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기의 룰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링의 공정성이 훼손되었을 때, 부모는 아이와 함께 아파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힘이 되어 줄수도 있겠지요. 또, 경기가 끝나고 링을 내려왔을 때, 비난이나 평가보다는 따뜻하게 안아주고 응원해 줄 수도 있겠지요. 우리 아이들이 제가 동경한 힉슨 그레이시처럼 언제나 이기는 게임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챔피언도 아마추어 선수나, 이제 막 링 위에 올라간 풋내기도 링 밖에서는 그냥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친구나 애인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 싸움을 대신해 줄 사람이 아닌, 내 싸움을 응원하고 나를 지지해 줄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그렇기에 부모가 청소년 자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그 경기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닌,
바라건대 가능한 코치도 전문가에게 맡기고,
관중석에서 응원하는 것, 믿고 기다리는 것, 링을 내려왔을 때 꼭 안아주는 것
까지가 꽤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 몫이 아닌 일에 너무 열심히 하지 않기,
내 바람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기,
참가비는 내줘도 대신 싸워 주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링 안으로는 선수만 입장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