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의 접촉에 통증을 느끼는 지수, 닿아도 아프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지난 이야기
멍든 몸을 감추고 클럽에 간 윤영은 미성년자성매매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간다. 보물같이 아끼던 명품 하이힐을 잃어버리고 거친 맨발로 시궁창 같은 인생을 걸어 나온다.
(지수) 리버사이드 10시
클럽 안에는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어젯밤 지수는 은호와 헤어지고 새벽이 되어서야 가게에 있는 숙소로 들어갔다. 오전에 학교로 갔다가 오후에 가게에서 일하고 밤이 되어 혜림과의 약속을 위해 나왔다. 혜림은 돈많은 호구가 바이크를 좋아하니 올테면 오라는 식으로 말했다. 지수가 외부에서 데려온 손님은 따로 커미션이 붙어 월급 이외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피곤했지만 큰 음악 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강남대로에서 신사동 방향으로 올라가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강남이 아닌 것 같은 낡은 상가건물에 오래된 음식점과 술집이 빽빽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들을 비집고 들어가면 지하 구석진 곳에 클럽이 있었다. 미성년자들도 슬쩍슬쩍 들여보내 주고 근처 싸구려 모텔에서 은밀히 조건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요새는 여자들뿐만 아니라 어린 남자애들을 찾는 여자들도 많다며 지수에게 생각 있으면 알려달라고 달라붙는 형들도 있었다. 지수는 그런 사람들이 몸서리쳐지게 싫었지만, 그들도 소중한 고객이었다.
지수는 매니저에게 혜림의 이름을 대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클럽은 전자음악의 쿵쿵, 삑삑거리는 소리 때문에 속이 거북할 지경이었다. 좁은 복도를 따라 룸으로 들어가니 그나마 숨을 쉴 것 같았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한 것은 나름의 전략이기도 했지만, 늦게 오면 사람들로 붐볐고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이 싫었다. 옷을 입은 채 부딪치는 것도 싫었지만 헐벗은 여자들의 살갗이 맨손이나 팔에라도 닿으면 숨이 멎을 것처럼 답답하고 닿은 부위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병원에도 가봤지만, 실제 피부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동물도 기계도 옷도 식물도 괜찮았지만, 사람의 살이 특히 여자의 살이 닿는 것이 싫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혜림이 한 무리의 남자들과 함께 룸으로 들어왔다. 혜림의 나이 보다 열 살은 훌쩍 많아 보이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나마 20대로 보이는 남자의 옆구리에 쏙 들어가 있던 혜림이 그들에게 지수를 소개했다. 지수는 90도로 허리를 숙여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했다. 곧이어 웨이터가 들어왔고, 썰렁하던 테이블에 양주와맥주, 안주, 토닉워터와 물병, 글라스가 가득 깔렸다. 이내 한 눈으로 보아도 스무 살을 넘지 않은 것 같은 여자애들이 웨이터를 따라 룸으로 들어왔다. 하나 같이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피부를 하얗게 드러내고 있었다. 지수는 몸이 움찔했지만 애써 참았다. 소녀들이 남자들 사이사이에 앉았고 술잔이 오고 갔다.
혜림이 잠깐 나간 틈을 타서 혜림의 옆자리에 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혜림이 말한 돈 많은 호구 남친인 것 같았다. 뭐라도 얘기를 걸어보고 얼굴도장을 찍고 싶었지만, 이미 꽤 취해있는 것 같았다. 이쯤 해서 그냥 돌아가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자리를 털고 나가려던 찰나 문을 열고 혜림이 들어왔다. 그리고 혜림을 따라 들어오는 여자에게 그의 눈이 멈췄다.
윤영, 그녀였다.
지수가 윤영을 처음 만난 것은 혜림이 일하던 미용실에서였다. 혜림의 부탁으로 출근길을 데려다주러 간 날이었다.
- 땡큐!
- 내가 고맙지. 퀵 값은 달아놓는다!
- 어휴. 지독하다 지독해.
혜림은 가방을 챙길 시간도 없이 핸드폰만 달랑 들고 지수의 오토바이 뒤에 올라탔다. 혜림은 지수의 호주머니에 핸드폰을 쏙 넣고 지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여자들과의 신체접촉을 극도로 피했지만, 혜림이라면 맨살이 닿는 것만 아니면 견딜 만했다. 혜림은 오랫동안 그에게는 동생 같은 친구였다. 그녀는 귀찮으면서도 밉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자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로부터 반항하던 시절, 그녀는 아버지가 말하는 쓰레기 같은 애 중 한 명이었다. 혜림은 지수를 좋아했고 그 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밝은 것 같지만 챙김 받지 못한 외로움은 서로를 알아보게 했다. 성격이 급한 혜림이 지수에게 고백했지만, 둘은 이뤄지지 않았다. 혜림을 피했던 지수와 달리 그녀는 거절을 당하고도 지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혜림은 금방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지수와는 그 뒤로도 쭉 친구로 지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지수가 오토바이를 세우자마자 혜림은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미용실로 달려갔다. 지수의 재킷 호주머니 안에는 혜림이 넣어 놓은 핸드폰이 그대로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헬멧을 그대로 쓴 채 머쓱하게 혜림이 일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일하는 사람들과 손님들로 혼잡했다.
사장이 주변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혜림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야! 너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지각이야.
- 죄송합니다.
- 그런 식으로 하고 월급 다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 최저임금도 안 되는데요.
- 뭐라고?
- 야근수당도 못 받고 주휴수당도 못 받았는데요.
- 이게 진짜! 너 아직 수습이야 수습! 수습이 뭔지 몰라?
- 수습기간 3개월도 훨씬 지났는데요.
- 어머. 얘, 말하는 거 봐.
- 혜림이 어제 늦게까지 일했어요. 오늘 제가 천천히 와도 된다고 했는데 원장님께 말씀을 못 드렸네요.
- 윤영쌤 진짜야? 그럼 왜 말을 안 해서 나만 나쁜 사람 만들어.
- 죄송해요, 원장님. 혜림아, 세탁실에서 수건 좀 정리해 줄래?
- 야 너! 담부터 또 늦으면 바로 해고야! 알았어?
사수로 보이는 여자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혜림의 손을 꼭 잡고 토닥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혜림의 어깨를 감싸 안고 사장에게 눈을 흘기고 있는 혜림을 데리고 세탁실 방향으로 들어갔다. 차콜 색 원피스에 비닐로 된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여자가 까만 생머리를 찰랑이며 돌아섰다. 가지런한 뱅 헤어에 하얀 얼굴 때문에 도무지 나이를 알 수 없었다. 화장기가 옅은 얼굴에 입술만 유독 빨갛게 칠해 더 도드라져 보였다. 헬멧을 쓰고 쭈뼛거리는 지수를 데스크 직원이 불러 세웠다.
- 어떻게 오셨나요? 머리 하러 오신 건가요?
- 네? 네.
- 예약하셨어요?
- 아니요.
- 컷 하러 오셨어요? 아니면 펌 하러 오셨어요?
- 컷이요.
- 받고 싶은 디자이너가 있으세요?
- 좀 전에 저 선생님도 돼요?
- 누구요?
- 좀 전에 여기 계시던…….
- 아. 윤영 쌤이요. 그 선생님은 지금 예약이 꽉 차 있고 다른 분만 가능해요. 하시겠어요.
- 아. 네…….
- 그건 계속 쓰고 계실 거예요??
- 아……. 네, 아뇨.
데스크 직원이 지수의 헬멧과 재킷을 받아줬다. 재킷을 벗으니 반팔 티셔츠를 입은 지수의 단단한 근육질 상체가 그대로 보였다. 스스로 얘기하지 않으면 지수가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80cm가 넘는 키에 몸도 건장했다. 얼굴에서는 아이라기보다 남자 티가 물씬 났다. 쌍꺼풀 없는 눈에 높게 솟은 콧대가 매섭게 보였지만 입술은 아이처럼 장난스럽게 보였다. 직원도 그런 지수를 다시 보는 눈치였다. 지수의 초콜릿 색으로 그을린 얼굴에 까맣고 반곱슬인 머리칼이 이마를 살짝 덮고 있었다.
여자들이 북적이는 미용실은 지수가 절대 들어가지 않는 곳 중의 한 곳이었다. 지수는 주로 남성 전용 미장원에서 신속히 머리만 자르고 샴푸는 하지도 않고 돌아갔다. 지수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이 꺼림칙하고 불편했다.
유치원 때였던 것 같다. 유치원이 끝나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지수는 엄마에게 폭 안겨본 기억이 한번도 없었다. 엄마는 지수를 안거나 살짝이라도 손대는 일이 없었다. 엄마로서 꼭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언제나 한 발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예민하고 불편한 사람이었고, 지수에게는 항상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날은 유독 친구들이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고 서슴없이 손을 잡고 매달리는 모습이 부러웠던 것 같다. 그때, 지수는 미끄럼틀 계단에서 넘어져 손과 무릎에 빨갛게 피가 고여 울음이 왈칵 터졌다. 다른 친구들이 ‘아줌마 지수 다쳤어요!’ 하고 소리를 지르고 친구 엄마들도 지수의 엄마를 바라봤다. 어쩔수 없이 엄마가 지수에게 다가왔다. 그날은 왠지 엄마에게 안겨도 아프다고 울어도 받아줄 것 같았다. 지수가 엄마의 다리를 와락 껴안았을 때, 순간 엄마가 딱딱하게 굳었다. 엄마는 지수를 떼어내며 “아. 싫어.”라고 토하듯 말했다. 그 말이 지수의 마음에는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싫어.’ 그 뒤로도 그랬다. 여기저기 작은 상처가 생겼을 때도 엄마는 지수를 토닥여주는 일이 없었다. 지수가 엄마를 애써 잡고 안기는 일은 없었지만, 몸동작이 미숙해 살짝 몸이 닿을 때에도 여지없이 엄마의 얼음같은 표정을 벌로 받았다. 지수의 몸은 잘못한 것도 없이 매번 거절당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몸이 먼저 거부했다. 다른 사람의 피부가 살짝만 닿아도 미모사처럼 움츠러들었다. 남자들하고 운동은 해도, 여자들과 피부접촉은 불편했다. 지수는 사람의 몸보다 차가운 기계가 좋았다. 이미 차가울 거라고 예상되는 기계. 그리고 함께 있으면 예상되는 만큼 뜨거워지는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좋았다. 부드럽고 살아있는 살갗의 감촉은 지수에게는 통증이었다.
젊은 여자 직원 한 명이 지수 뒤에 섰고 어떤 스타일로 자를 건지 이것저것 물었다. 그리고는 지수를 샴푸실로 안내하며 앉으라고 했다.
- 혜림 씨, 여기 샴푸 좀! 혜림 씨!
- 혜림이 지금 세탁실 정리하던데.
지수의 시야에 아까 봤던 윤영이 들어왔다.
- 그게 급한 일인가? 얘 정신없네. 나 지금 펌 손님도 같이 봐야 하는데.
- 내가 해줄게. 지금 잠깐 괜찮아.
- 선생님이 왜요? 혜림이 불러요.
- 아냐. 괜찮아. 내가 금방 하면 돼.
- 그럼, 땡큐!
윤영이 지수의 머리를 마주 보고 섰다. 지수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윤영이 지수의 얼굴에 수건을 접어 올려주었다. 건조기에서 갓 빼 온 수건은 보송하고 따뜻했다.
- 손님, 샴푸 해드릴게요. 물 온도는 괜찮으세요?
- 네.
낮지만 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영의 손가락이 지수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능숙하게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었다. 얇고 긴데 힘이 있는 손가락의 감촉은 부드럽고 살아있었다. 사람의 매끄러운 손이 따뜻하게 지수의 몸에 닿아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이 신기하게 좋았다. 윤영의 손은 마치 오랫동안 지수를 알고 지내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지수가 방어의 벽을 쌓기도 전에 지수의 몸이 불쑥 ‘어, 안녕. 넌 괜찮아. 들어와도 돼.’ 라고 윤영의 손에만 활짝 문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윤영이 몸을 굽혀 지수의 목과 어깨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었다. 윤영이 손에 힘을 줄 때 살짝 그녀의 숨결이 얼굴에 덮인 수건으로 넘어왔다.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지만, 그녀의 손길은 통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윤영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설렜다. 그녀의 뺨에서 달콤하고 상큼한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형들이랑 라이딩을 갔을 때 맡은 길가에 핀 꽃향기 같았다. 린스까지 끝나고 윤영이 지수의 머리에 수건을 둘러 머리가 당기지 않게 살짝살짝 눌러주는데 벌써 끝났다는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 손님, 다 됐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지수는 돌아서는 윤영의 손끝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그다음은 어떻게 머리카락을 자르고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혜림의 핸드폰을 주는 것도 잊은 채 주머니에 그대로 가지고 와서 후에 혜림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당신의 손은 닿아도 괜찮은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기억 속에 "윤영"이라는 이름과 얼굴, 그녀의 향기와 감촉을 저장해 놓았다.
그녀가 앞에 있었다.
윤영.
지수가 윤영이 들어오는 입구 쪽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 민지숩니다.
윤영이 앞에 있었다. 윤영이 지수를 쳐다보고 웃었다. 지수는 내내 궁금했다. '왜 이 여자는 닿아도 괜찮았을까?' 그 순간에 일어난 특별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이 여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몸이 활짝 문을 열어준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 다시 윤영을 만나고 싶었지만, 혜림이 미용실을 나왔고 같이 다니던 양아치 같은 녀석과 미용실 금고를 털었다는 얘기를 듣고 만나는 것을 포기했었다. 다시 미용실에 가볼까? 몇 차례 생각도 해보고 그 앞에서 얼쩡거려 보기도 했지만,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막상 다시 닿았을 때 통증이 느껴진다면 너무 허무하고 외로울 것 같았다. 그렇게 먼발치에서 맴돌기만 했던 자신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새로운 사람이 오자 혜림의 호구남친이 폭탄주를 만들어 테이블에 돌렸다. 이미 취한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술잔을 들었다. 지수는 마시는 척하면서 입술만 적신 채 물컵에 술을 버렸다. 옆에서 윤영이 빠른 속도로 잔을 비웠다. 저러다 확 취할까 봐 걱정됐지만, 그렇다고 처음 만난 것이나 다름없는 사이에 술잔을 뺏을 수도 없었다.
- 너무 빨리 마시는 거 아녜요!
- 뭐라고요?
- 그러다 취하겠다고요.
말하지 않았지만 '그러려고 마시는 거 아니니'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슬쩍 팔이라도 붙여 볼까 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랬다가는 양아치가 될 것 같았다. 자신이 머뭇거리는 사이 다른 남자가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잔이 빌 때마다 계속 술을 부었다. 남자가 윤영이 완전히 취했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몸을 부비며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속에서 욱하는 기분이 밀려들었다. 지수는 일어서서 윤영을 자신의 안쪽으로 당겨 앉히고 남자 옆에 앉아 눈을 부라렸다. 이제는 미래의 고객이고 뭐고 다 술 취한 개처럼 보였다. 남자가 지수의 기세에 눌려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지수가 윤영의 술잔을 빼앗고 물병을 당겨 앞에 놔주었다. 어떻게든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윤영이 지수에게 입을 맞췄다.
첫 키스였다.
술에 젖은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촉이었다. 촉촉하고 말랑한데 부드러우면서 힘이 있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환하게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반응에 놀라고 있는 사이 그녀의 혀 끝이 지수의 입술을 열고 들어왔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자신의 혀끝을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감싸 안았다.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한 듯 정신이 아찔했다. 두 손으로 윤영의 허리를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때였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바지 속으로 들어왔다. 흥분한 채 놀라 그녀의 입술을 살짝 물어버렸다. 지수가 몸을 뒤로 뺐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무릎 위로 올라앉아 자신의 목을 애무했다.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몸 안으로 자신을 모두 넣어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짧은 원피스 안으로 손을 넣었다. 엉덩이와 허리 가슴까지 손이 올라갔다.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던 여자의 가슴이 투박한 지수의 손안에 가득 들어왔다. 따뜻하고 봉긋한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녀를 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통증도 괴로움도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했다.
지수의 어깨로 완전히 술에 취한 윤영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지수는 축 늘어진 윤영을 테이블에 기대어 놓고 엉덩이 쪽으로 올라간 치마를 다시 당겨주었다. 흘러내려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걸어주니 윤영의 발그레해진 볼이 보였다. 지수가 윤영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보았다. 웃음이 났다. 지수는 윤영의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살짝 꺼냈다. 다행히 지문으로 인식하는 구형 아이폰이었다. 윤영의 엄지손가락으로 핸드폰을 열고 자신의 번호를 찍어 통화버튼 누르고는 바로 최근 통화 내역에서 자신의 번호를 지웠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넣고 그녀의 가방을 잠든 윤영의 머리에 받쳐주었다.
다음 순간들은 모두 지수의 기쁨에 찬물을 뿌리는 일들이었지만 지수의 흥분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경찰들이 몰려왔고, 그 룸의 모든 사람과 클럽에 있던 꽤 많은 사람이 경찰서로 잡혀갔다. 윤영은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정신이 있던 지수와 다른 남자 몇이 한 차에 태워져 경찰서로 갔다. 윤영과 술에 취한 혜림, 여자애들 몇몇이 경찰차에 태워지는 것이 보였다. 높은 하이힐을 신고 아슬아슬 걸어가는 그녀가 내내 신경이 쓰였다. 경찰서 입구에서 윤영의 빨간 하이힐이 떨어져 있었다. 재빨리 주워 사람들 시선이 안 닿을 것 같은 계단 옆 수풀 속에 슬쩍 던져놓았다.
최악은 경찰관들이 아버지를 부른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도 미성년자라는 것이 너무 싫었다. 아버지가 도착할 때까지 지수는 유치장에 있는 윤영이 나와 조서를 작성하는 것을 벤치에 앉아 보았다. 한 참 후에 그녀가 한 발에만 힐을 신고 절름거리며 경찰서를 떠나는 것이 보였다. 몇 시간 후에 아버지가 경찰서로 왔다. 이미 새벽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듯한 아버지의 얼굴에는 피곤이 묻어있었다. 아버지는 경찰관을 만나고 서류에 서명을 하고 지수 쪽으로 다가왔다. 지수를 보는 아버지의 눈길에는 '네까짓 게 그렇지.'라는 경멸이 서려 있었다. 지수가 잘못한 것은 술자리에 간 것뿐이었고 신분증을 도용하지도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잘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크게 잘못한 것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이해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매번 얼어붙은 칼처럼 꽂히는 그의 눈길은 지수의 기분을 망쳐버렸다. 중학교 때부터 착한 아들이 되려는 노력을 멈춘 이후로는 더 그랬다. 아버지는 지수가 그의 기준 밖에 있다고 생각한 즉시 그를 자신의 선 밖으로 밀어버렸다. 아버지는 자신을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지만 이미 다 안다는 식으로 지금의 그리고 내일의 아들을 단정했다. 입 안에 쓰레기를 가득 문 것처럼 더럽고 불쾌했다.
아버지는 지수를 본체만체하고 혼자 떠났다. 지수는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홀로 경찰서를 나서면서 윤영이 던져놓고 간 나머지 힐 하나를 마저 챙겼다.
다음이야기
6. 원하는 대로 갈수록 미로
다시 만난 둘. 사귀자는 지수를 차에서 내보내고 돌아서 가던 윤영은 다시 유턴해 돌아가는데... 그녀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 글은 픽션으로 실제 인명, 지명, 장소 등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