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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Sep 16. 2024

6. 원하는 대로 갈수록 미로

윤영은 지수의 고백에 돌아서 가던 차를 돌린다.

지난 이야기

5. 첫만남, 첫키스

홀로 키운 아들 은호에게 발길질을 당한 날, 윤영은 홧김에 클럽에서 어린 남자를 만난다. 친구를 만나러 간 클럽에서 윤영을 다시 만난 지수는 진짜 그녀는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다. 손이 닿고 몸이 닿아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윤영에게 지수는 빠져든다.


  

윤영은 그날의 일들이 모두 꿈같이 느껴졌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은호에게 맞은 곳이 욱신거렸다. 주말에는 마치 동면하는 곰처럼 잤다. 다시 병원에 갔고, 오랫동안 미뤄뒀던 상담도 시작했다. 외면하고 싶은 모든 것이 그대로 였다.     


윤영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미용실로 갔다. 지난주에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해버렸지만, 윤영은 십대 철부지가 아니었다. 양아치가 되더라도 아무 대책 없이 생계를 접을 수 없었다. 2년간 일한 근속의 대가도 요구해야 했다. 헤어블랙의 원장이라면 싸우지 않고서 법적으로 보장된 퇴직금도 제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윤영은 알고 있었다. 윤영은 아무일 없는 듯 유니폼을 입고 헤어와 메이크 업을 다듬었다.  다른 디자이너들과 인턴들의 수근거림도 신경쓰지 않았다. 오픈 전에 원장이 도착했다.         


- 뭐야. 그만둔 거 아니었어?

- 아파서 하루 쉰다고 했는데 그럴 거면 나오지 말라고 하신 건 원장님이잖아요.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됐으니까 그만 가봐.

- 그럼 저 자르시는 거죠?

- 자르긴 누가 잘라. 먼저 그만두겠다고 한 건 김 선생인데.

- 아파서 그랬다고요. 다시 나왔잖아요.

- 아주 정신이 나갔나 보지?      


윤영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원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그냥 잘린 거로 해주세요. 전 실업수당 받고 원장님이 직원들 계약서도 안 쓰고 수당도 제대로 안 주고 손님들한테 사기친 건 저도 비밀로 해드릴게요. 그 밖에도 제 입 막고 싶은 거 많으실 텐데요. 옆 건물 비었던데 제 손님들 끌고 간판 한번 달아 볼까요?        


일주일 만에 나타나 태연하게 협박하는 윤영의 태도에 원장의 얼굴이 싸늘하게 일그러졌다. 윤영도 이판사판이었다. 원장이 자신의 따귀라도 때린다면 그 자리에서 드러누울 각오까지 하고 왔다. 다행히 윤영의 퍼런 서슬에 원장은 핸드폰을 든 손만 바들바들 떨었다. 어차피 윤영은 헤어샵에 다시 나가고 싶은 의지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원장은 윤영은 물론 다른 직원들에게 야간이나 주말 근무수당을 주지도 않았고 정당한 쉬는 시간은 고사하고 식사 시간 조차 편히 주지 않았다. 혜림과 같은 미성년자 인턴들에게 법정최저임금도 주지 않으면서 교육이란 명목으로 야간시간까지 부려 먹기 일쑤였다. 손님들에게 제품을 속여서 쓰거나 돈 많은 손님이 있으면 슬쩍슬쩍 알 수 없는 명목의 비용을 덧붙여 온 것도 알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윤영이 맡고 있던 VIP 손님이 많았기 때문에 옆에 미용실을 새로 연다고 하면 그것만큼 꺼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것보다는 실업급여 받으며 조용히 있어 주는 것이 원장으로서도 이익이였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일이 기쁜 일은 아니었지만, 윤영은 남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는 풋내기는 아니었다. 윤영은 원장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영이 운영하던 가게를 팔고 남은 돈이 좀 있기는 했지만, 매월 고정적으로 나가는 생활비와 은호의 교육비를 고려할 때, 다만 얼마의 실업수당도 아쉬웠다. 윤영은 이런 상황에서도 은호의 학원비를 걱정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윤영은 헤어블랙에서 자신이 쓰던 미용 도구들을 천천히 그리고 알뜰히 챙겼다. 2년 동안 일해 온 터라 자신의 물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물건도 물건이지만, 이제 윤영을 찾는 단골손님들이 꽤 생긴 터라 월급 이외의 인센티브도 꽤 됐었다. 자신의 단골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것은 못내 아쉬웠다. 윤영은 자신의 사물함을 열고, 문 안쪽에 붙여놓은 은호와 자신의 사진을 뜯어냈다. 끈적끈적하게 붙은 테이프가 덜 떨어지면서 은호와 윤영이 사선으로 쭉 찧어졌다. 윤영은 찧어진 사진을 손으로 구겨 뭉갰다. 하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쇼핑백에 던져 넣었다. 윤영은 머리카락이 덜 붙는 소재의 앞치마를 벗고, 유니폼은 접어 사물함에 다시 놓았다. 가슴에 달린 ‘디자이너 윤영’이라고 새겨진 이름표만 챙겼다. 아래 칸에서 집에서 신고 온 스니커즈를 꺼내 슬리퍼와 바꿔 신었다. 몇 개월도 안 돼 앞코가 해진 높은 굽의 까만 슬리퍼를 버리지 못하고 계속 신고 일했었다. 윤영은 슬리퍼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아들이 원하는 브랜드 운동화는 몇 켤레씩 사주면서 자신은 인터넷에서 만 원짜리 신발을 사서 신었다. 그나마 한 켤레 있던 명품 구두는 그날 이후 안녕이었다.


윤영은 건물 뒤에 주차해 놓은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가방에서 전자담배를 꺼내 피웠다. 건물 뒤 주차장은 윤영이 일을 하며 잠깐잠깐 나와, 담배를 피던 곳이었다. 몇년간 일한 곳에서 마지막을 얼굴 붉히며 끝내는 것이 아쉬웠지만, 이미 꼬일 대로 꼬인 윤영의 인생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손으로 담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봤다. 그때, 모르는 발신 번호가 뜨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윤영은 엉겁결에 통화버튼을 누르고 대답했다.   

      

-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전 민지수라고 하는데요. 기억하세요?

- 누구라고요?

- 지난주에 리버사이드에서 혜림이랑 같이 만났던 남자요.      


윤영이 놀라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민지수라는 이름보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름은 가물가물해도 목소리만큼은 또렸했다. 앳된 얼굴에 비해 성숙한 목소리였다. 윤영은 클럽에서 만취하여 경찰서에 간 이후로 혜림과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수의 전화는 무방비상태인 윤영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윤영의 파지 된 기억 속에 지수는 윤영의 옆자리에 앉아 키스를 나눴고 그 후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윤영은 옆에 앉은 남자의 부드러운 혀가 자신의 입안에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머쓱하게 있었던 기억이 났다. 술로 많은 기억이 끊어졌지만 몇몇 기억과 감각만큼은 사진처럼 명확하게 윤영의 몸에 남아있었다. 귀끝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윤영은 중저음인데 참 맑은 지수의 목소리가 그냥 취해서 그렇게 들린 건 아니었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윤영이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윤영은 받지 않았다. 한 차례 더 울리더니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카톡이 날아왔다. 메시지에는 윤영이 잃어버린 하이힐 한 짝의 사진도 있었다.      


- 만나서 할 말 있어요. 줄 것도 있고요. 잠깐 시간되세요? 제가 일하시는 곳 근처로 가도 되고요.  


윤영은 지수의 문자를 보고 순간 당황했다. 지수에게 미용실 상호를  알려준 적이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봤지만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클럽에서 술에 취해 뭐라고 떠들었는지는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윤영이 지수에게 답장을 보냈다.           


- 할 말 없는데요.

- 전 있는데요.

- 어딘데요?

- 송원역 근처요

- 그럼, 거기 맥도날드 앞에서 기다려요.
  

미용실 근처였다. 혜림이 가르쳐 준건가 의심이 됐지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도 모른 채 갑자기 혜림에게 전화해서 확인하기도 곤란했다. 윤영은 지수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싶지않았다. 그렇다고 어린 남자애가 직장 근처에서 서성이게 할 수도 없었다. 난동을 부리고 그만두는 마당에 치정에 얽힌 헛소문까지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미용실은 집에서도 멀지 않았다. 시동을 걸고 지수가 말한 역으로 출발하려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아니요. 송원공원 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윤영은 어이가 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장소 때문에 더 왈가왈부 할 수 없어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핸드폰 네비게이션 어플을 열어 공원을 검색했다. 알고 있지만 자주 가는 곳은 아니었고, 윤영은 끔찍한 길치였다. 핸드폰을 거치대에 끼우고 차를 빼려고 룸미러를 확인하는데 서른이 넘은 여자가 보였다. 일할 때는 유니폼을 입으니 출근할 때는 아무렇게나 하고 나왔다. 트레이닝 복을 입은 자신이 오늘 따라 유독 후줄근해 보였다. 미용실에서 메이크업과 드라이를 한 건 다행이었다. 다시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까 하다 근처 아울렛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평일 오후라 차가 많았다. 몇군데의 가게만 둘러 보고 캐주얼하게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사서 입었다. 너무 신경 쓰는 것으로 보이기는 싫었지만, 이마에 아줌마라고 써 붙이고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쇼핑을 하고 화장실에서 메이크 업을 한 번 더 손봤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 시간으로 부터 두시간 가까이 지나있었다. 하지만 지수로 부터 온 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그가 그냥 가길 바라면서도 정말 가버렸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시 목적지를 공원으로 설정하고 차를 몰았다.  

     

공원입구 근처 벤치에 지수가 앉아있었다. 실제 그를 보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로 차를 세울 엄두가 안나 공원을 한 번 더 돌았다. 윤영은 차를 입구 쪽으로 가까이 대고 보조석 창문을 살짝 내리고 경적을 눌렀다. 지수가 윤영 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차 쪽으로 걸어왔다. 지수 뒤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 타요.     


지수는 머뭇거리지 않고 윤영의 옆 좌석에 앉았다. 은호도 또래에 비해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그는 월등히 컸다. 군살 없이 마른 체형이었지만 골격이 단단해 보였다. 하얀 면 티셔츠에 낡아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궁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까맣고 장난스러운 눈과 도톰한 입술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예뻤다.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몸이 바짝 긴장됐다. 윤영은 미용실 직원들이나 은호의 친구들이 지나가다 자신을 볼까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차의 썬텐을 더 까맣게 하지 않은 것이 이제와 후회가 됐다. 머뭇거리는 찰나에 지수가 먼저 말했다.      


- 여기서 조금만 가면 대학교 있어요. 차 댈 곳도 많고 밤에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 그냥 여기서 빨리 얘기해요.

- 싫은데. 가요. 가면 말할게요.


지수는 안전벨트를 메고 담담히 앉아있었다. 어린애가 뭐하자는건가 살짝 짜증이 밀려왔다. 내리란다고 순순히 내릴 것 같지도 않고 태연히 앉아 있는 애와 싸울 수도 없었다. 그래도 혜림을 두고 아는 사이에 자신에게 해꼬지 할 것 같진 않았다. 차 주변으로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차 안을 흘끗거렸다. 길가에 계속 차를 정차해 놓을 수도 없었다.  윤영은 기어를 드라이브로 바꾸고 지수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의 말대로 골목으로 들어가니 알고 오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법한 대학교 정문이 나왔다. 윤영은 입구 근처 건물 앞에 주차하고 말했다.   


- 보자는 이유가 뭐죠? 그때 일 인사라도 듣고 싶어서?

- 구두요. 당신 거죠?      


지수는 들고 있던 쇼핑백 봉투를 윤영에게 건넸다. 쇼핑백에는 하이힐 한 켤레도 아닌 한 짝이 들어있었다. 윤영이 쇼핑백을 뒷좌석에 두고 말했다.  

  

- 그럼 이제 볼 일은 끝난건가요?

- 아뇨.  

- 빨리 가야해요.

- 사귀고 싶어요!


윤영은 당황해서 소리를 내서 웃을 뻔 했다.

 

- 너 내가 몇 살인지 경찰서에서 못 들었니?

- 서른 둘이요. 그게 뭐요.     


윤영은 자신도 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그의 말대로 캠퍼스 안은 한적했다.  웃기지 말라고 하고 나오고 싶었지만, 지수의 표정이 진지했다.     

  

- 너 나랑 사귀고 싶어?

- 네.

- 너 나랑 자고 싶구나?

- 네. 네?!     


지수의 목덜미와 귀까지 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우뚝한 콧날에 비해 소년같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또르르 귀 옆으로 흐르는 것이 보였다. 당당하게 윤영을 불러내던 패기는 보이지 않았다. 윤영은 피식 웃음이 났다. 은호를 기르면서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거의 결혼할 뻔한 남자도 있었다. 한때는 은호에게 든든한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잘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남편은 몰라도 아빠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마지막은 은호와 자신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윤영은 남자에 대한 환상도 기대도 없었다.      


- 내려.      


윤영이 가방을 뒤적여 담배를 꺼내려던 찰나 지수의 얼굴이 윤영의 눈앞에 바짝 다가오더니 이내 윤영에게 키스했다. 지수의 키스는 투박했다. 지수가 윤영의 오른손을 꽉 잡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몸을 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윤영은 굳이 리드하려 하지 않았다. 지수의 입술은 어린아이의 입술처럼 보드라웠고, 입안에서는 상큼한 포도 맛이 났다. 지수의 오른손이 윤영의 블라우스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움켜줬다. 피멍이 든 허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짧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윤영이 몸을 뒤로 확 빼며 소리질렀다.    

     

- 그만해! 진짜 내려. 아니면 이대로 경찰서로 갈 테니까.

- 미안해요. 당신도 원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진심이에요. 만나고 싶어요.

- 너 미쳤구나. 빨리 내려!     


지수가 더 어쩌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윤영은 바로 시동을 걸고 캠퍼스를 빠져나왔다.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윤영 자신도 몰랐다. 사이드미러로 건물 앞에 버려진 지수가 점점 작아지는 것이 보였다. 윤영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끔찍한 길치인 윤영은 모르는 곳에 갈 때는 미리 가는 길을 확인하고, 내비게이션으로 정확히 목적지를 맞추고서야 출발했다. 하지만 그렇게 애써 찾은 길도, 목적지도 항상 옳지 만은 않았다. 가로등도 별로 없는 길에 신호등의 점멸등이 깜박였다. 아랫배에 아련하게 조여 오는 간질거림이 느껴졌다. 태연한 척했지만, 윤영의 몸도 지수의 도발에 반응하고 있었다. 술도 마시지 않고 취한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차를 세워 핸드폰으로 내비게이션을 맞춰야 했지만, 선뜻 차를 세우지 못했다. 집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윤영은 집으로 갈 생각만 해도 갑갑했다. 은호를 낳고도 ‘엄마’라는 꼬리표가 익숙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릴 적부터 ‘엄마’란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고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귓가에 '자식 다 필요 없다.'는 엄마의 조롱이 들렸다.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환청처럼 ‘정말 바라는 것이 뭔가요?’란 상담사의 말이 반복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윤영은 다시 유턴해서 지수가 있던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 아이에게 무엇을 기대하거나 꿈꾸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자신이 원하는 욕망 그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윤영은 어둠 속에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지수를 발견하고 다시 경적을 울렸다. 지수가 윤영의 차에 탔다. 윤영은 속도를 높여 캠퍼스 안쪽으로 달렸다. 캠퍼스는 생각보다 넓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져 주변은 어둡고 적막했다. 차는 산 아래 누구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멈췄다. 빗방울은 더욱 거세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키스하기 시작했다. 이내  윤영이 지수의 목을 거칠게 애무했다. 지수가 윤영의 블라우스를 벗기려다 블라우스 앞 단추가 우두둑 떨어져 나갔다. 브레이지어 위로 반쯤 가려진 가슴이 드러났고  옆구리에서 허리까지 내려온 검붉은 피멍이 나풀거리는 옷 사이로 보였다. 지수가 놀란 눈으로 윤영을 봤지만, 윤영이 그런 지수의 얼굴을 당겨 다시 키스했다. 지수의 손이 윤영의 허리를 잡지도 놓지도 못하고 있었다.  윤영이 운전석에서 지수의 자리로 넘어와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자신을 간절히 원하는 그를 응시했다. 그의 젖은 셔츠를 벗기자 근육으로 단단한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윤영이 그의 가슴을 애무했고 입술이 닿을 때 마다 두근거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윤영의 온몸으로 전율이 흘렀다. 정신이 아찔했다. 윤영은 스스로 상의와 브레이지어를 벗고 맨 가슴으로 그를 안았다. 한동안 둘은 그렇게 꼭 껴안고 있었다. 쿵쾅 거리는 심장소리가 하나가 된 것처럼 울렸다. 지수가 자신의 가슴에 포개어져 있는 윤영을 떼어 데시보드 위로 살짝 밀었다. 갈비뼈가 드러나보이는 옆구리 부터 골반 선까지 넓게 퍼져있는 피멍이 그대로 보였다. 지수가 윤영의 상처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갖다 댔다. 그의 혀와 입술이 닿을 때 마다 자신의 몸이 블랙홀처럼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점점 거세어진 빗방울이 차를 뚫을 것처럼 떨어졌다. 한 방울 한 방울이 작은 폭죽처럼 차에 닿으며 터졌다. 윤영이 다시 지수의 상체를 세워 그의 바지 버튼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윤영은 지수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손에 묻어났다. 지수도 윤영의 바지와 속옷을 천천히 벗겼다. 윤영이 그런 지수를 가만히 기다려줬다. 지수의 눈앞으로 윤영의 나체가 오롯이 드러났다. 어둠이 그 위를 덮었지만, 지수는 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곡선을 본 적이 없었다. 지수의 두 손이 윤영의 골반에 걸쳐졌다. 한동안 지수와 윤영의 거친 숨소리가 밀폐된 차 안에서 낮고 조심스럽게 울렸다. 시동이 꺼진 차안은 격한 호흡에 습기로 가득 찼다.       




다음 이야기

7. 너만 보이고 너만 들려

홀로 남은 지수는 사랑을 나눈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상으로 돌아가도 자꾸 웃음이 나고 자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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