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li Whale Jan 15. 2023

B. 생각은 마음의 길을 따라가요.

우울할 때 드는 생각은 잠시 "보류"

6개월이 넘게 장기간으로 상담을 오는 내담자 B가 있습니다. 고등학생인 B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신 이후 평생 친모를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때 새엄마가 오셨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언제 떠날까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엄마가 조금만 표정이 변해도 불안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안은 다른 불안을 끌어들였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의존했고 그들이 B를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면 B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죽고 싶은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고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자신이 그럴 능력이 안된다고 생각할 때마다 자책하고 자해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B를 만났을 때 그녀는 무수한 칼자국이 빗살무늬처럼 촘촘하던 팔뚝을 가리지 않고 내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과거에 이미 여러 번 상담을 받았던 B는 큰 기대도 큰 실망도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슬픔과 절망을 나지막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어떤 날은 50분 동안 줄곧 눈물을 흘리고 어떤 날은 종알종알 기분이 좋았고 또 어떤 날은 자살방지 서약서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여름 셔츠가 긴 팔이 되고 옷도 점점 두꺼워져 이제는 뽀글이 재킷을 걸치고도 싸늘한 날씨가 되었습니다.


- 엄마가 어제는 짜증을 냈어요.

-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 엄마가 새 재킷을 사주셨는데 제가 지난달 산 재킷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엄마한테 그건 마음에 안 드냐고 물어봤어요.

- 내 재킷을 엄마가 맘에 안 들어하실까 봐 신경이 쓰였나 봐요.

- 네. 엄마가 내 재킷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산건가 해서요.  

- 엄마가 짜증을 낸다는 것은 B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 엄마가 절 싫어하는 것 같아요.  

- 엄마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했다면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도 들었겠어요.

- 네. 그래서 어제는 자해를 했어요. 다 내 잘못이에요. 그렇게 묻지 않았다면 되었을 텐데요.

- 몰려오는 불안과 자책에 너무 괴로운 마음이 들었나 봐요. 괜찮다면 그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나요. 나는 어떤 식으로 몇 번 정도 엄마에게 물어봤나요?

- 네 번 정도요. 엄마한테 내 옷이 맘에 들지 않냐고 물어봤어요.

- 엄마는 처음부터 짜증을 냈나요?

-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계속 물어보니까 짜증을 냈어요.

- 엄마는 정말 B가 싫어서 짜증을 냈을까요?

- 아니요... 싫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엄마가 아니라고 했는데 자꾸 물어봐서 그런 것 같아요.

- 네. 엄마는 B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답을 했는데 반복해서 물어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B는 왜 같은 질문을 네 번씩 했을까요?

- 모르겠어요. 엄마가 제 재킷을 싫어할 것 같아서요.

- 네. B는 엄마가 그 재킷을 또 그 재킷을 산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 네.. 맞아요.

- 아마도 불안한 마음에 엄마에게 괜찮다는 위안을 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어요.

- 네..

- 그때, 그날의 나는 얼마나 우울하거나 불안했을까요? 0에서 10이라고 한다면 10은 너무 힘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몇 정도 우울했나요?

- 어제는 8에서 9까지 갔어요.

- 그래서 자해까지 하게 되었나 봐요.

- 네.

- 8에서 9일 때 생각은 어떻게 꼬리에 꼬리를 물던가요?

- 엄마가 짜증을 내는 건 다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런 엄마에게 나도 짜증이 났어요. 하지만 이런 마음을 갖는 제가 너무 싫었어요. 부모님은 절 위해 많은 것을 해주신 분들이잖아요. 제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 그렇죠. 결국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고 내가 죽어야 끝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지금은 우울감이 어느 정도일까요?

- 지금은 6 정도인 것 같아요.

- 그럼 지금은 어떻게 생각이 들어요?

- 엄마가 내가 싫어서 짜증을 낸 건 아닌 것 같아요. 엄마도 그냥 백화점에서 이 옷이 예뻐서 사신 것 같아요.

- 네 그런데 내 기분이 8까지 나빴을 때 생각은 어땠나요?

- 엄마가 날 싫어한다고... 내 옷이 맘에 안 들어서 새로 샀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 그렇죠. 어떤 생각이 더 사실일까요?

- 지금이요...

- 그렇죠.  엄마는 B가 입으면 예쁘겠다는 생각에 그 옷을 사셨을 거예요. 아마 이전에 어떤 옷이 있었는지는 기억도 못하셨을 수 있어요. 엄마가 짜증을 낼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B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아마 B도 엄마를 사랑하지만 짜증 내거나 까칠하게 대할 때가 있을 거예요.

- 맞아요...

- 생각은 마음의 길을 따라가요. 내 마음이 기쁠 때는 노래를 부르면서 따라오고 내 마음이 슬플 때는 울면서 끌려오죠. 그러니 기분이 6 보다 더 안 좋을 때는 우선 생각을 멈추고 "보류" 해보세요. 앞으로 생각해 볼  시간은 충분해요. 당장 그때, 지금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너무 우울할 때는 어떤 결정도 나에 대한 평가도 잠시 보류해요.  기분이 어느 정도 나아졌을 때, 그때 다시 생각해도 돼요.


B는 그렇게 상담실을 떠났습니다. 아마 지금의 과정을 우리는 여러 번 반복할 거예요.




생각은 장님 같아서 마음의 길이 비추는 등불을 어렴풋이 보고 따라갈 때가 많지요.

하지만 한 번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간 생각은 다시 옳은 불을 찾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기분을 객관적으로 수치화해 보고 몇 이상일 때 잠시 멈추고 기다려 볼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은 나를 더 깊은 늪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 본문의 사례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실제 사례를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와는 다른 내용입니다.


    


 

이전 05화 A.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