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li Whale Jan 13. 2023

A.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

나는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상담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상담 목표를 구체적으로 잡는 일입니다. 상담실에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오는 사람은 드뭅니다. 솔직히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국가에서 제공하는 무료상담은 대부분 6~10 회 정도 제공되고 유료 상담은 1회에 8~12만 원 정도를 내야 합니다. 한 달이 아니고 한 회, 50분에 10만 원을 내고 성인이 될 때까지 상담을 받기는 꽤 어렵습니다. 상담이 성인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상담은 말 잘 들어주는 친구와 만나서 50분 수다를 떠는 시간도 아니죠. 그래서 가능한 구체적으로 실제 확인할 수 있는 목표를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A는 대학교 3학년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원하지만 경제적인 능력도 심리적인 준비도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부모님은 A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오랜 기간 갈등이 심해진 상태였고 그나마 집에 있는 A가 유일한 대화의 통로였습니다. 특히 A의 어머니는 굉장히 통제적인 사람이라 성인인 K의 삶에 너무 많은 개입을 하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는 A에게 화를 냈습니다. A는 자책이 심했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는 어떤 시도도 비난받았습니다. 


초기면접 상담이 끝나고 다음 회기에 A와 만나 상담의 목표를 잡았습니다. A가 가장 변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모습은 무엇인지, 그렇게 했을 때 지금과 무엇이 달라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함께 찾아봤습니다.


- 저는 독립하고 싶어요.  멘탈이 강해져서 혼자 자책하고 우울해져서 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 A가 가장 바라는 일은 심리적인, 경제적인 독립인가 보네요. 멘탈이 강해지면 우울감의 강도도 지속기간도 줄어들 거라고 기대하는 것 같아요.

- 네 맞아요.

- 독립을 한다면 현실적으로 얼마나 걸릴까요?

- 아...... 대학도 졸업하고 우선은 취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 네. 그럼 적어도 2~3년은 걸리겠네요.

- 네.


A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나는 A4용지를 가로로 놓고 긴 선을 쭉 그으며 말했습니다.


- 괜찮아요. 하면 돼요. A의 목표는 독립이에요. 지금 22살이니까 내년에 졸업하고 내 후년에 취업, 그리고 돈을 좀 모아서 독립도 할 수 있겠어요.

- 네. 어휴. 그때까지 어떻게 참죠.

- 참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막막하죠. 하지만 A는 경제적인 독립만이 목표는 아니잖아요. 심리적인 독립도 계속해나갈 수 있어요. 우리는 지금 그 시작을 하는 거예요. 독립을 하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 3개월 동안 또 6개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 음... 토익공부를 해볼래요. 자격증 시험도 쉬운 것부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너무 좋은 목표네요. 멘탈이 강해지기를 바란 면도 있어요. 지금은 얼마나 우울할까요? 0~10이라고 하면 10은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요.

- 엄마랑 싸우거나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8~9 정도는 우울해요.

- 그런 일은 얼마나 자주 생기고 또 한 번 우울하면 얼마나 오래 지속되나요?

- 한 달에 한번 이상은 생기는 것 같아요. 한 번 우울해지면 일주일 이상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아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 그렇군요. 높은 강도로 1주일 정도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거네요. 그럼 지금의 이런 상태가 상담을 받으면서 어떻게 변하기를 기대하나요?

- 저는 그냥 돌아서면 잊었으면 좋겠어요. 엄마랑 싸우든 누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네.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 몇 년은 걸릴 것 같아요.

- 그죠. 세상 더없이 쿨해지는 건 참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다면 상담을 받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변하기를 현실적으로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  우울한 정도가 6 정도 낮아지면 좋겠어요. 우울해하는 기간도 하루 이틀 정도로 줄어들면 좋겠고요.

-  정말 좋은 목표네요. 너무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우울감이 6 정도 낮아졌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음... 자책이 줄어들 것 같아요. 지금은 다 제가 모자라서 그렇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다 내 책임 같아요.

- 그렇죠! 맞아요. 우울감이 줄어들면 자책이 줄어들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다 합리적으로 볼 수 있을 거예요.


A는 처음 2~3년은 걸릴 것 같은 자신의 바람을 3개월로 6개월로 1년으로 쪼개고 그 목표에 따라 기대되는 변화 모습과 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실천 목표를 상담 속에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우선은 3개월의 목표를 가지고 매주 방문을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내담자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잡아주는 저의 방법입니다. 내담자의 목표는 상담의 등불입니다. 중간평가를 하고 그때그때 수정하기도 하지만 처음의 목표는 상담이 종결될 때 가장 큰 성취감의 척도입니다. 내담자가 그 목표를 이뤘을 때 실제 불편감이 줄어들고 일상생활이 처음보다 나아지면 무엇보다 내담자 본인이 적은 대로 바란대로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내담자를 만나든 상담자로서 바라는 나의 목표가 있습니다.


인생은 힘들었던 과거를 안고, 언제나 처음인 오늘을 살고, 알 수 없는 내일을 바라보며 가는 무섭고 설레는 여행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오늘 진흙탕에 발이 빠질 수 있고, 내일 좀 실수해도 아무도 못 볼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완벽한 날 상상하지도 못한 폭탄이 뚝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를 만나는 모든 내담자가 어떤 순간에도 처음 정한 그 목표를 잘 지키는 것 만이 상담 목표는 아닙니다. 누군가는 잘 지켜나가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고 누군가는 잘 되다가 또 슬럼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목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다시 시작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는 한 인생은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옆에 함께 쭈그리고 앉아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가 있다면 그게 누구라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그때 그 순간 없었다면 언제든 상담실로 다시 오라고 얘기합니다.




나는 당신의 성공도 응원하지만, 무엇보다 당신이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응원하는 사람이니까요.


"상상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by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본문의 사례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실제 사례를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와는 다른 내용입니다.


이전 04화 iii. 상담은 얼마나 받아야 할까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