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햇빛(sunny)
누구나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이 있듯이 나에게도 그런 직업이 있다. 부러움에서 그치지 않고 변화를 위해 한 발 떼었다.
#3. 언어재활사(언어치료사)
*언어치료사 → 언어재활사로 명칭 변경
● 개인플레이가 가능한 직업
사회복지는 변수가 많은 직업군으로 파워 계획형인 내가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자꾸만 틀어져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그리고 혼자서 일을 할 수 없고 팀플레이로 이루어지는데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내겐 잘 맞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장애인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치료사들을 부러워하고 동경했다.
내가 일했던 곳에는 언어재활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가 있었는데 각자 독립된 방에서 50분 치료하고 10분 동안 치료 아동의 보호자 상담을 하거나 다음시간 치료 준비를 하며 짜여진 스케쥴 대로 근무하는 루틴 있는 삶이 부러웠다.
● 대학에서 배운 지식 적용
6개월 간, 치료사분들과 협업하여 프로젝트를 하였었다. 얼굴을 보고 업무 얘기를 하려면 치료가 없는 시간이나 짬나는 쉬는시간에 내가 찾아가곤 했다.
이 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언어재활사 선생님이 계신 방에 들어가고자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든 순간.
전공서적을 집중해서 보고 있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야 할지, 방해 하지 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다 ‘똑똑똑’ 하고 문을 두드렸다.
“열심히 공부하고 계셔서 다음에 찾아올까 하다가 들어왔어요.”
“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동이 있는데 평소 접하기 어려운 케이스여서 책을 좀 보고 있었어요.”
그렇게 업무 얘기를 마치고 치료실을 나오는데 언어재활사 선생님 뒤로 후광이 비쳐 보였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온전히 일에 접목하고 새로운 치료법이나 이론은 1년에 한 번씩 있는 보수교육 또는 학회 세미나를 통해 채워가는 모습도 전문가 다웠다.
사회복지사도 협회가 있고 전문가 라고 불리지만 대학에서 배운 전공과목을 실전인 회사에서 써 먹은 기억이 별로 없다.
연차가 쌓이면서 무뚝뚝한 내가 능구렁이가 되고 말빨과 글빨만 늘은 거 같아 현타가 가끔씩 왔다.
언어재활사가 되기 위해선 4년제 대학을 다시 가야했다.
4년을 다시 공부하기엔 부담스러웠다. 또한 졸업 후 12월에 있는 언어재활사 자격증 시험을 한 번에 붙지 못한다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특수교육대학원을 선택한다.
2년 반~3년 간 다니기에 1년이라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대학원 마다 다르긴 하지만 야간과 토요일에 수업이 있어서 직장과 병행하여 공부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에 특수교육대학원이 스무곳 정도 밖에 없어서 돈만 있으면 대학원 간다는 말은 이 분야에선 통하지 않았다.
충남에 있는 G특수교육대학원에 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았는데 결과는 합격도 불합격도 아닌 희망고문인 ‘대기자’
추가합격이라도 되면 좋겠는데... 아마도 안 될 거 같다. 면접 때 보니 경쟁률이 10:1은 되어 보였다.
극 현실주의적인 나는 플랜B를 가동하였다.
#4. 간호조무사
● 해외봉사 중 마주한 풍경
20대의 끝자락, 29살에 개발도상국으로 날아가 2년 동안 해외봉사를 하면서 내가 했던 건 사회복지 전공을 살린 3차 서비스였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 중산층 계층의 아이들이 책을 보러 내가 일하는 곳에 오고 교육을 들으러 왔다.
기관으로 출근을 할 때면 국립병원이 있는 중심가를 지나가야 하는데 매일 아침 생사를 오가는 아이들이 엄마 품에 안겨 병원 문 밖으로 긴 줄이 이어졌다.
국립병원은 우리나라의 보건소와 같은 곳으로 비용이 저렴해서 이곳으로 몰렸다.
● 병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살면서 헤어스타일을 긴 머리 일때는 똥머리로 질끈 묶거나 단발일 때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꽂아 항상 단정한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내 직업을 ‘교사, 은행원, 간호사’ 라고 유추 했다.
2년간 해외봉사를 하며 매일 생과 사를 오가는 상황을 보니 32살에 한국땅을 밟으며 나도 의료계통에서 일하고 싶어졌다.
“엄마, 나 간호조무사 공부 해 보는 거 어떨까?”
“간호조무사는 무슨. 하던 사회복지사나 하셔.”
내가 다시 대학을 가서 4년 동안 간호사 공부를 할 정도의 용기와 똑똑함은 없다고 판단하였고 현실적으로 간호조무사는 가능하다 생각하였다.
그 때는 새롭게 시작하는 32살이 엄청 나이가 많다고 느껴졌는데 39살인 지금 생각해보니 32살은 젊었다. 그 때로 돌아가면 간호사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엄마가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너, 주사 맞을 때 바늘도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면서 무슨”
바늘 공포증이 있는 건 아닌데 피 보는 것도 무섭고 주사 맞을 때면 항상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다.
사람은 살면서 3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사회복지사에서 간호조무사로 직업을 바꿀 기회가 32살에 찾아왔었다.
다시 이 기회를 올해 39살에 잡아 보기로 했다.
유방암에 걸리고 나니 나와 같은 아픈 사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 몸이 아프다는 신호를 지나치지 않고 해결하고자 병원을 가거나 약국에서 약을 사 먹는 등 빠르게 조치를 취하곤 한다.
또한 암환자는 면역력을 올려야 하는데 면역주사 라고 불리는 것들은 혼자서 배에 주사를 놓아야 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간호조무사 공부를 하면 내게 도움이 될 게 분명하였다.
근무시간 외에는 야근이 없는 것도 매력적이고 말이야.
다음달인 3월부터 국비지원을 받아 간호조무사 공부를 시작해 보려 한다.
엄마에겐 아직 비밀로 하고...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