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는 결혼을 하나의 연극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연극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수없이 연습하고 정해진 시나리오를 외우고, 무대 위에서 약속된 감정과 대사를 정확히 이어가면 결국 막이 내린다. 관객의 박수를 받고 나면 배우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역할과 현실은 분명히 나뉘어 있다. 연애도 비슷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였다. 설레는 첫 장면이 있고, 때로는 갈등도 있고, 결국 어떤 결말로든 막이 내려갔다.
그래서 결혼도 그 연장선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의 나는 사는 일이 너무 버거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던 것 같다. 맞지 않으면 헤어지면 되는 거 아닌가, 요즘 그런 일은 흠도 아니잖아, 하는 가벼운 마음도 솔직히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야기의 다음 장면,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진지한 연극 한 편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결혼은 혼자 쓰는 연극이 아니었다. 작가가 둘인, 과정도 끝도 알 수 없는 함께 써 내려가는 이야기였다.
둘이 쓰는 연극인 결혼에는 시나리오도 없고 연습도 없고, 막이 내려가는 순간도 없었다. 연애처럼 싸우고 나서 연락을 끊거나 잠수를 탈 수도 없었고, 서로 얼굴 보기도 싫은 날에도 시댁 행사가 있으면 가서 웃어야 했다. 결혼은 내 삶 속으로 들어와 나를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뜻대로 흘러가던 내 삶의 무대는 어느새 함께 쓰는 무대로 바뀌어 있었다. 나의 습관, 시간, 감정, 선택이 모두 누군가와 연결되기 시작했고, 혼자일 때는 아무것도 아니던 일들이 함께의 문제가 되었다. 내가 중심이던 세계는 어느새 둘의 세계가 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나라는 역할이 흐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게 우울했다. 내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데 돌이켜 보니 그 전의 나는 고집스럽고 내 세계가 너무 단단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 자아가 조금 흐려지자, 대신 현실적이고 조금 더 씩씩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나, 두 사람의 세계가 합쳐진 낯선 공간에서 어디까지가 나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내가 자라고 있었다.
연애는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시간이었지만, 결혼은 서로의 삶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일이었다. 좋은 날도 많았지만 숨이 막히는 날도 있었고, 솔직히 도망가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연극이라면 막이 내려가고 관객이 떠나면 끝났겠지만, 결혼이라는 무대는 다음 장면이 또 이어졌다. 준비되지 않은 채 계속 올라가야 하는 무대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결혼은 누군가와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계속 조율하며 살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연극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만, 결혼은 매일 새롭게 써 내려가는 이야기였다.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 갑자기 바뀌는 분위기, 웃다가 울고, 울다가 다시 웃게 되는 긴 무대.
돌이켜 보면, 결혼을 통해 남편과의 장을 쓰고, 아이와의 장을 쓰고,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의 장을 이어가며 내 모습 또한 계속 새로 쓰이고 있었다. 이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드러나지 않았을 내 안의 여러 모습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안의 나를 하나씩 불러내며, 진짜 나를 만들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