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스물아홉의 끝자락, 나의 20대의 계절은 늘 시린 겨울뿐이었다. 20대의 대부분을 나는 '언젠가 빛날 나'라는 신기루를 쫓으며 보냈다. 잡히지 않는 꿈은 갈증을 낳았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결국 나 자신을 찔렀다. 화려한 세상에 섞이지 못한 나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생존했다. 사람들을 피했고, 어두운 자취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살아야 했기에 꾸역꾸역 직장을 다녔지만, 통장에 찍히는 숫자는 비참했다. 서울의 비싼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나면 월급의 절반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남은 돈으로 한 달을 버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생전 해본 적 없던 카드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몇 번의 현금서비스 돌려 막기 끝에 신용점수는 바닥을 쳤고, 대출 창구는 차갑게 닫혔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구나."
거울 속의 나는 초라했다. 아무도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았다. 보잘것없는 나, 빚만 남은 서른 직전의 여자. 인생이 완전히 망했다고 확신하던 그때, 언니와 형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거래처에 정말 성실한 청년이 하나 있는데, 한 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사실 나는 '꼴에' 눈이 높았다. 무너져가는 현실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엔 백마 탄 왕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세련되고 멋진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 주길 바라는 헛된 로망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나타난 남자는 나의 모든 기대를 무참히 깨뜨렸다.
그는 짙은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 결정적으로, 첫 만남에 '추리닝'과 '슬리퍼' 차림이었다. 밤새 일을 마치고 눈도 제대로 못 붙인 채 달려왔다고 했지만, 내 눈엔 그저 무례하고 투박한 사람으로만 보였다. 마음의 문은커녕 곁조차 내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투박한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세운 높은 벽을 향해 그는 매일 아주 느리고 조용하게, 하지만 꾸준히 노크를 했다. 나는 가진 게 없다고, 아니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내 인생은 엉망진창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의 과거도, 나의 통장 잔고도, 나의 초라한 자존감도 그에겐 고려 대상이 아닌 듯했다.
"그냥, 나 믿고 한번 살아봐유. 내가 평생 책임질게유."
아니? 내가 잘못 들었나? 영화의 대사인가? 어떻게 이런 호언장담을 뻔뻔하게 꺼낼 수 있는 거지? 내가 그동안 만났던 신중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던 사람들은 절대 꺼내놓지 않던 약속이었다. 투박한 사투리로 그가 건넨 말은 화려한 수식어보다 묵직했다. 그 말이 자꾸만 나를 무너뜨리는 게 짜증났지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됐다. 어느 날,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은 햇빛에 타서 검었고, 손가락은 짧고 뭉툭했으며, 거친 일을 증명하듯 손바닥엔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여 있었다. 검게 그을린 그 손이 하얗게 질린 내 손을 꼭 쥐었을 때, 이상하게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감옥이자, 가장 따뜻한 도피처였다.
우리는 그렇게 결혼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혼식 날, 나는 기쁨보다 슬픔에 잠긴 사람처럼 펑펑 울기만 했다. 신부 화장이 지워질 정도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축복받아야 할 날에 왜 그렇게 서러웠을까. 친구가 "어디 팔려가기라도 하니, 왜 그렇게 울어?"라는 말에 나는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며 대성통곡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일종의 '억울함'이었던 것 같다. 내가 꿈꿨던 서른 살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상상했던 결혼식은 이런 감정이 아니었다. 내가 설계했던 완벽한 인생의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했고, 내가 그토록 거부했던 '평범하고 투박한 삶'에 투항해 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울게 했다.
하지만 마흔 중반에 가까워 온 지금, 나는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정말 다행이야. 네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세련된 구두 대신 슬리퍼를 신고 왔던 그 남자는, 여전히 투박하지만 한 번도 내 손을 놓은 적이 없다. 내가 스스로를 포기했을 때조차 그는 나를 '귀한 사람'으로 대접해 주었다. 화려한 성공은 아니어도, 그의 굳은살 박인 손이 일궈낸 평온한 일상이 나를 치유했다.
나의 20대를 지배했던 결핍과 파괴적인 정서는 그의 조용하고 안락한 사랑 안에서 서서히 녹아내렸다.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했던 스물아홉의 끝에서 만난 그 투박한 손. 그 손바닥의 온기가 사실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안정이자 구원'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소심하고 예민한 관종이었던 내가, 이제는 이 투박하고 조용한 사랑을 기록하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은, 내 생각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