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할수록 무뎌지는 여행자의 양심

런던인 파리아웃

by orosi

실감에 무딘 편이다.

가만 보면 캐릭터라기보단 최근 그런 삶을 살고 있어서 인지도. 여행을 앞두고 굳이 실감이란 걸 해내지 못했던 까닭이 여럿이구나 싶다. 이제와보니 그렇다.



학급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일에 온 마음이 치우쳐 있었던 게 첫째 이유일테고.

내 통장엔 내내~ 묘연했을 액수의 엄청난 예산을 정산하느라 기빠진 수포자라서? 이게 둘째.

셋째라면, 2023을 마무리하라는 공문과 동시에 2024는 어떻게 할래?를 물어오는 각종 사업 계획서들에 치여사는 일상이 그것이었으리라.

애썼다. 나.



게다가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연재 제목에 걸맞게 굳이 갔던 곳에 또?라는 선택권 없는 자의 소심한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자잘한 의미를 깊이 부여하고야 마는 이 집 남자의 몹시 섬세한 성격에도 좀 지쳤던 것 같다.


한 번은 아쉽다 쳐도 두 번이면 족할 줄 알았던 도시들을 말이다. 세 번을 그것도 기어이 혹을 양쪽에 달고 가려니, 심심한 위로를 받을 게 불을 보듯 뻔한 위치 아닌가.




-어머~~ 런던? 파리도? 너무 좋겠다.

-음.. 그게요. 블라블라;;


-아~~ 애들이랑? 엄청 추억되겠네...


잠깐!

"애들"이 포인튼가, 아님 "추억"이?

추측건대 "엄청"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도 같다. 하나(애들)는 원인,하나(추억)는 개고생을 애둘러 표현했을 결과,

마지막 것(엄청)에는 나를 향한 위로이거나 본인을 위한 위안 정도가 농도 깊게 담겨있을 거다. 하하.

(대화의 시작과 마무리가 제법 판이했던... 그녀의 말끝? 과 입꼬리는 원래부터 세트인지 내려가는 속도 참 동일했다)



매우 기대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다면 거짓, 어려운 건 사실이다.

만삭의 배로도 다섯 살 아이와 해외여행에 망설임 없던 파이팅 넘치던 아줌마는 이제 없다.

30대와 40대의 차이라고 핑계 삼기에 좀 멋쩍다.


고작 이틀 앞두고 있다며 이제와 누굴 재우치랴.

쌈박한 여행계획은 없지만, 아이들도 나도

이것 만은 하고 오자는 각자의 페이보릿 한 가지씩 소박하게 챙겨본다.


첫째 아이: 덕후답게 해리포터스튜디오 방문, (자기 주도적 2023년에 대한 보상으로 마틸다, 라이언킹 뮤지컬 관람)

둘째 아이: 오직 하나, 에펠탑에 올라 레이디버그 노래 부르기

나: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돈트북스 방문, 파리에선 미술관보다 도서관에 좀 더 머물기



아빠? 글쎄... 거기까진 묻기 어렵게,

섬세한 감성에 그간 바빴을 애비는.. 안타깝게도 이미 지쳐 보인다. 어쩌랴.

여행 이틀 전, 여전히 무딘 엄마나 가기도 전에 넉다운된 아빠나.

생긴대로 사는 것 밖엔 도리가 없다.


이 와중에 연재를 시작한 데에 자발적 박수를 보낸다. 양심은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