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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가객 Apr 18. 2023

백자 다관에 스며든 찻물의 빛깔

다구들이 말을 건다

 다실에 앉으면 다구들이 말을 건다. 백자의 질감이 손에 닿는 순간 일렁이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고요하게 멈춰있던 시간이 열린다. 고온의 불가마에 들어앉아 속으로 응결되어 가던 뜨거운 시간이 느껴진다. 흙이 물과 불을 만나 빚어지는 지난한 여정은 느리고 길었으리라.


 얼굴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 많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행운이다. 내가 차를 배우는 방법도 순전히 사숙이었으니 인류의 문화가 전래되는 비밀한 방법에 동참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굴을 알지 못하는 도공이 혼을 불사르며 구워낸 다구를 나는 오늘도 가지런히 정돈하며 그 빛깔과 형태의 예술적 기품에 감탄한다. 앞에 놓인 담박한 백자 다관과 물 식힘 그릇과 잔들, 벌써 연을 맺은 지 이십여 년을 넘긴 나만의 보물들이다.   


찻물이 배어 나온 우전과 백차 전용 다관

   

 세월을 거치면서 다관은 다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졌다. 수차례의 이사와 차회며 강의에 동행하기 위해서다. 덕분에 그의 외관은 도구들끼리 부딪치고 내 손길에 길들여지며 자잘한 상처를 갖게 되었다. 다관의 안쪽은 시나브로 찻물이 스며들어 표면까지 차 빛깔이 배어 나왔다. 사용하면 할수록 더 묵직한 빛깔이 배어 나오는 오묘한 차심은 열심히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얻은 눈가의 웃음 주름처럼 정겹다.      





다구관리와 길들이기     


 불가마에서 완성된 다관을 처음 구입해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품고 있던 불내와 소성되는 과정에서 다관에 묻은 불순물을 우려내기 위해서다. 다관을 길들이고 관리하는 것도 전해 내려오는 자료들이 많고 전문가마다 각자의 방법이 있어 함부로 논하기엔 조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손쉽게 차를 마시기 위한 실용성에 중점을 둔 나의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맛있는 차를 마시기 위해선 도구를 관리하고 길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매우 귀찮은 과정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차를 즐기는데 수반되는 또 하나의 즐거운 과정으로 삼으면 그 또한 유익할 것이다. 처음 차를 접할 때는 거름망이 들어있는 간단한 티포트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부드러운 망사 수세미를 사용해 컵을 세척하는 방법으로 관리하되 거름망은 솔을 이용하여 세척하면 된다. 차의 매력에 빠져들면 점차 마시는 차의 종류가 많아진다. 화차나 대용차는 유리다관을 사용하여 테라피(Therapy) 효과를 보기도 하지만, 녹차를 원료로 하는 발효차들의 경우 도자기 다관을 길들여 사용하면 차 특유의 맛과 향을 더할 수 있기 때문에 발효도에 따라 각각의 다관을 구별하여 우리게 된다.      


 각자의 취향과 용도에 따라 차전용 도구들을 갖추다보면 항상 청결하고 아름답게 차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관리에 마음을 쏟게 된다. 차 도구는 구입해서 처음 사용할 때가 중요하다. 유리다관의 경우, 깊이와 넓이가 충분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찻수건을 깔고 천연세재인 베이킹소다와 과탄산나트륨을 1:3 비율로 섞어 뿌려둔다. 수건 위에 유리다관과 거름망 유리잔을 넣고 끓인 물을 다관이 잠길 만큼 붓고 나서 기포가 떠오르도록 둔다. 30분 후에 다구를 건져 미지근한 물로 찻수건을 이용해 헹구어낸다. 천연세제의 성분을 완전히 제거한 뒤에 말려서 사용한다. 사용 후에 차 전용 수건을 사용해 닦아내고 물로 헹구면 되지만 차물이 들었을 땐 천연세재를 사용해 관리하면 항상 청결하게 사용할 수 있다.     


불가마나 가스가마에서 나온 다관의 경우 처음엔 찬물에 담가둔다. 일주일 정도 매일 물을 갈아주다 보면 불내와 함께 미끌거리는 성분이 점차 옅어진다. 그 후에 끓는 물에 15분간 팔팔 끓여낸다. 이때 신선한 녹차를 3g 정도 같이 넣고 끓여 잡내를 제거하고 세정 효과를 높인다. 따스한 물로 헹구어 햇살에 안쪽과 바깥쪽을 뒤집어 말린 후에 사용한다. 사용한 후에는 찻잎이 남아있지 않도록 비우고 전용 솔과 전용 행주로 닦고 끓는 물로 소독한 후에 엎어서 말려둔다. 이 과정이 꽤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길들이지 않은 다관으로 차를 마셔본 사람이라면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운 백담선생의 다구들     


 내가 사는 지역에 즐겨 찾는 백담도요가 있다. 무형문화재로 다인들의 존경을 받은 백담 이광 선생의 불가마가 있는 곳이다. 선생이 생전에 계실 때 남편과 함께 자주 찾아뵙고 손수 달여 주시는 차를 마시며 선생의 말씀을 듣곤 했다. 다인을 사로잡는 장점과 매력을 고루 갖춘 다관의 탄생 과정과 유약에 대한 이야기들은 재미있었다. 스스로 차를 즐긴 백담선생의 다관들은 손에 잡는 순간 내손에 착 감겼다. 다관을 잡을 때 닿는 손가락 자리, 찻물이 가득 든 다관을 기울일 때 중심을 잡아주는 자리와 뚜껑을 고정할 때 손의 지문이 닿는 자리가 맞춤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선생은 오래전에 받아놓았던 보이차와 전차들을 보여주시며 먹을 수 있겠냐 물으셨다. 차의 보관상태를 보고 함께 시음하면서 관리법과 마시는 방법을 말씀드렸다. 나는 될수록 선생의 다관들을 갖춰놓고 싶어 일 년에 한두 점씩 구입하곤 했는데, 선생께서 말차 다완은 안 쓰냐고 물으시며 다완을 선물해 주셨다. 내게는 없는 붉은빛이 도는 다완이었다.  


백담요 - 백담 이광의 다완

  

 존경하는 선생의 다완을 받고 너무 기뻐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말차를 꺼내 격불 했다. 황톳빛 다완에 담긴 푸른 말차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말차를 입에 넣는 순간 불내와 함께 역한 맛을 느끼고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너무도 당연한 우림의 과정을 생각지도 못한 이유는 찻자리에서 건네주셨기 때문에 선생께서 길들여 사용하던 다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먹을 수 없게 된 말차를 헹궈내고 다완의 굽에 코를 대었을 때 불가마에서 막 꺼냈음직한 불내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불내를 기억하려고 한동안 굽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잊을 수 없는 냄새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평생을 도예가로 살아온 선생은 뵐 때마다 무명한복 차림이셨다. 이제는 뵈올 수 없어 그리워할 뿐이지만 백담의 황톳빛 다완은 나의 최애장품이자 애용품이 되었고 그 경험으로 차도구의 관리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스토리만 남기고 떠난 다구들을 기억한다     


 생활다인에게 차 도구는 생필품이다. 차와 함께하는 동안 차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차 도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도자기 다구에 점점 더 깊이 매료되고 있다. 그 이유를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생명의 유한성에 대비되는 자연물의 영원성 앞에 끌림을 느끼게 된 것이다. 곧 사라질 존재가 이후에도 역사적 유물로 남아있을 무정물에게 품는 느낌은 가볍지 않다.


 창조신화는 피조물에 대한 신의 일방적 사랑을 기록하고 있다. 신은 우주만물을 완전하게 세팅하고 맨 마지막(여섯 번째 날)에 신의 형상을 따라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생령을 불어넣었다. 인간을 연구한 많은 텍스트 중에 나를 설득한 가장 강렬한 기록이다. 신은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고, 사람은 같은 재료인 흙을 빚어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들을 구워냈다. 원시인의 토기는 인류가 화학적 가공을 하여 만든 최초의 도구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같은 흙으로 빚어진 다구를 만질 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 편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실에 앉아 다구를 손질하는 시간, 잠시 일상에 쉼표를 찍는 그 시간이 나를 가지런하게 정돈하고 돌아보게 한다.


흠집이 있어도 애용하는 백자 다관


 차와 함께한 다관들, 내가 길들인 다구들과의 인연과 이별을 기억한다. 성한 것 하나 없는 나의 다구들. 세상살이에 서툰 내가 그렇듯 나의 다구들도 온전하지 않다. 사치품으로서가 아니었기에 과하게 애정을 바치거나 보호하기보다는 즐겨 사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누군가 차를 시작하면 잘 길들여 차심이 든 다관을 내주었고, 차벗과 동행한 아기손님의 손에 닿아 깨지면 붙이고 수선해서 다시 사용했다. 심하게 파손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다기들은 앙증맞은 다육이를 품고 베란다에서 햇살을 맞이하고 있다.      


 나는 한 번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 흠집이 나도 쓰는데 지장이 없으면 그냥 사용한다. 다시 길들여 사용하다 보면 배어 나온 찻물이 상처를 감춰준다. 성형이 유행하는 시절처럼 도자기도 성형술이 있다. 은이나 점토로 보수할 곳을 색다르게 성형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목공예를 하시는 지인에게 의견을 구하고 솜씨 없는 우리 부부의 손으로 매만지는 것이 고작이지만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오히려 스토리를 품고 있어 정감이 간다.          





백자다관의 매력     


 기억에 남는 다관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백자 다관들이 마음에 오래 남는 것 같다. 유독 정이 가는 이유는 차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다. 차를 마실수록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찻물의 빛깔이 좋다. 마음을 준 백자다관이 깨지면 순간 마음이 서늘하다. 스토리만 남기고 사라진 백자 다관들이 많다. 그래서 애지중지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비운다. 가장 좋은 것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 손에 들린 다관은 1~2인용의 작은 백자다. 눈 맞추고 모셔 와서 우림과 길들임으로 사귀고 애용하는 것 이상은 없다. 그것이 아무리 흔하거나 값싼 것일지라도 내 모든 추억이 깃드는 순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한한 시간을 함께할 연결점인 것이다.  

   

 많은 다기 세트를 차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보냈지만 나의 다실엔 아직도 아름다운 다구가 많다. 있는 곳으로 모이게 마련인 끌어당김의 법칙의 현현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귀한 다구들을 소유하고 있다. 차 대접을 받은 지인과 친구들이 십수 년 보관하고 있던 다구들을 길들여달라고 맡긴다. 하나하나 관계의 스토리를 품고 있는 다구들이기에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의미가 깊다. 그러나 그렇게 길들이고 정 들인 다구들과의 연도 시작되는 시점이 있는가 하면 끝나는 순간도 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인생이 유한하듯 물건도 쓰임을 다하면 순환하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것의 특성은 사라져 가는 찰나 속에 존재한다는 것. 눈으로 보는 순간 잊고 마는 찻물의 스밈과 지워짐의 흔적, 그 아쉬운 찰나를 몸에 간직한 백자 다관에 애착을 느끼는 이유다.






백자 다관에 우리는 차들     


 나는 도자기의 빛깔에 맞춰서 차를 우린다. 백자에 우리는 차들은 불발효 차인 우전과 10% 약발효한 백차다. 곡우 전에 따서 덖은 우전과 약발효 차인 백차는 여린 잎차다. 시들림과 뜨거운 온도에 덖이는 과정 속에서 살청이 되면서 마른 잎이 가두고 있던 향기는 찻잎이 적절한 온도의 물을 만났을 때 폭발적으로 발산된다. 마실 때마다 절로 정갈해지는 느낌도 그 고급스러운 차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 때문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나면 다미의 극치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외에 맛이 섬세하며 성질이 온순한 댓잎차를 백자 다관에 우린다. 어린 죽순을 덖어 만든 댓잎차는 달달하고 맑다. 밀도가 좋고 침출이 원활하여 여러 번 우려먹을 수 있다. 독은 없고 청혈작용이 뛰어나다. 끓는 물을 그대로 사용하되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침출해도 충분히 우러난다.  


20여 년째 보수해서 애용하고 있는 백자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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