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안먹어, 이것도 안먹어

아이의 광야를 함께 걷는 부모 - 기질과 발달로 이해하는 기독교 교육

by 인생질문

"이거 싫어. 안 먹어." 편식하는 아이


1.

식탁 앞에서 아이가 숟가락을 내려놓습니다. 어제는 잘 먹던 반찬인데 오늘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억지로 한 숟가락 넣어주면 얼굴을 찡그리고, 심하면 뱉어버립니다. 부모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2.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급식 식판에서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고 나머지는 그대로 버립니다. 밥, 김치, 고기 반찬 하나. 매일 이 세 가지만 반복합니다. (이렇게만 해도 사실 땡큐) 부모님들은 걱정합니다. 영양이 편중되면 성장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이 아이가 왜 이러는 걸까.


3.

그런데 편식을 단순히 '입이 짧은 것'이나 '버릇이 없는 것'으로만 보면 놓치는 것이 많습니다. 아이가 음식을 거부하는 행위의 이면에는 생리적, 발달적, 심리적, 그리고 영적 차원이 겹쳐 있기 때문입니다.


4.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감각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빼놓으면 아이를 오해하게 됩니다. 어떤 아이들은 감각이 유난히 예민하게 발달해 있습니다. 직업치료학에서는 이것을 '감각 과민(Sensory Over-Responsivity)'이라고 부릅니다.


5.

이 아이들은 음식의 맛뿐 아니라 질감, 온도, 냄새, 심지어 색깔에도 강렬하게 반응합니다. 미끌거리는 식감, 물컹한 느낌, 특정 냄새가 이 아이들에게는 단순한 불쾌감이 아니라 실제적인 고통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6.

작업치료사 윈니 던(미국의 직업치료학자)은 아이들의 감각 처리 방식이 저마다 다르며, 이것이 일상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음식을 놓고도 어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먹고, 어떤 아이는 입에 대는 것조차 힘들어합니다. 이것은 의지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신경계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아이에게 다르게 주신 감각 체계의 차이입니다.


7.

이런 아이에게 "왜 안 먹어, 다 먹을 때까지 일어나지 마"라고 강요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감각 과민이 있는 아이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는 것은 음식에 대한 트라우마를 만들 수 있고, 오히려 편식을 더 심화시킵니다. 이 경우에는 부모의 훈육이 아니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감각 통합 치료나 섭식 치료를 통해 아이가 감각적 어려움을 점진적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8.

그러나 모든 편식이 감각의 문제는 아닙니다. 집에서는 안 먹던 음식을 친구네 집에서는 잘 먹는 아이가 있습니다. 캠프에서는 잘 먹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감각이 아니라 심리와 환경의 문제입니다.


9.

아동기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자율성의 발달입니다. 아이에게 '무엇을 먹을지 내가 정한다'는 것은 자기 세계를 통제하려는 자율성의 발달입니다. 다른 영역에서 통제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일수록 식탁에서 자기 의지를 관철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쉽게 말하면 부모가 "한 숟가락만 먹어"라고 강요할수록 아이는 더 강하게 거부합니다. 이것은 음식과의 싸움이 아니라 통제권을 둘러싼 줄다리기입니다.


10.

먼저 중요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원칙을 정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역할은 '무엇을, 언제, 어디서' 먹을지를 결정하는 것이고, 아이의 역할은 '얼마나, 먹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역할 분담이 무너질 때, 즉 부모가 아이의 영역까지 통제하려 할 때 식탁은 전쟁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11.

물론 감각과 환경의 문제로만 이 문제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입맛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고,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은 거부하는 것. 음식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기대에 맞지 않는 상황,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하루, 내 뜻과 다른 사람. 우리는 매일 '내 만족'을 기준으로 세상을 걸러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면으로 보면 아이의 편식은 이 본성이 식탁 위에서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12.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불평했던 장면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매일 먹을 것을 주셨는데, 그들은 "우리 눈에는 이 만나 밖에 보이는 것이 없도다"(민 11:6)라며 한탄했습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는 마음.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른이나 아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14.

그렇다면 부모는 편식하는 아이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먼저 아이의 편식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15.

감각이 예민한 아이라면,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훈육이 아니라 이해입니다. 특정 질감이나 냄새에 강하게 반응하는 아이에게 "그냥 먹어"라고 말하는 것은, 소음에 예민한 사람에게 "그냥 참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시작하십시오. 새로운 음식을 접시에 올려놓는 것부터. 냄새를 맡아보는 것부터. 혀에 살짝 대어보는 것부터. 한 단계씩, 아이의 속도에 맞춰 가십시오.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16.

심리적으로 통제권을 주장하는 아이라면, 식탁을 전쟁터로 만들지 마십시오. "한 숟가락만 먹어"라는 강요, "이거 안 먹으면 디저트 없어"라는 협박, "왜 맨날 이것만 먹어"라는 비난. 연구에 따르면 음식을 강요받은 아이는 그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오히려 더 강해집니다. 대신 새로운 음식을 만날 기회를 반복적으로, 그러나 압박 없이 제공하십시오. 섭식 연구에 따르면 아이가 새로운 음식을 수용하기까지 평균 10~15회의 노출이 필요합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17.

아이를 음식의 과정에 참여시키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장을 보러 갈 때 아이가 직접 재료를 고르게 하십시오. 요리할 때 씻고 다듬는 과정을 함께하십시오. 음식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아이가 준비 과정에 참여하면 그 음식에 대한 수용도가 눈에 띄게 높아집니다. 자기가 만든 음식은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자부심의 대상이 됩니다.


18.

그리고 식탁을 감사의 훈련장으로 만드십시오. 형식적으로 "감사하고 먹어라"가 아닙니다. 식사 전에 아이와 함께, 이 음식이 식탁에 오기까지 누구의 수고가 있었는지 한 가지만 이야기해 보십시오. "이 반찬은 엄마가 너 학교 가 있는 동안 만든 거야." "이 과일은 아빠가 퇴근하고 마트에 들러서 골라온 거야." 아이의 시선이 '내 입맛'에서 '누군가의 마음'으로 옮겨질 때, 음식은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 됩니다.


19.

부모인 우리도 돌아봐야 합니다. 아이에게 "골고루 먹어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우리 자신은 삶에서 골고루 받아들이고 있는지. 내 취향에 맞는 상황만 감사하고, 내 기대에 맞지 않는 상황은 불평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이의 편식은 어쩌면 우리 자신의 삶의 편식을 비추는 거울일 수 있습니다.


20.

사랑하는 부모님, 편식은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일 가르칠 기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이의 감각을 이해하십시오.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십시오. 그러면서도 내 만족만을 기준으로 세상을 거르는 좁은 마음에서, 주어진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넉넉한 마음으로 자라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식탁은 매일 그 훈련을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입니다.


21.

한 줄 기도, "하나님, 우리 아이가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하려는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주어진 것 앞에서 감사를 배우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넉넉한 마음을 허락하소서. 그리고 하나님, 부모인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허락하소서."


유찬호 목사 | 등대교육공동체 교목

biblestory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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