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속 '거북 도상'의 변화와
상징 이야기 (13)

고구려 고분 벽화 속의 거북(1)

by 연아 아트

지금까지 거북 도상의 기원과 변화,

생물학적 특징, 그리고 문헌 속에서 거북이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어떠한 이유로 '거북'의 상징성을

나타나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우리 나라에서

'거북 도상'의 변화와 상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전기까지

'거북 도상'의 변화를

시대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아래 <표>와 같다.

거북도상 변화 (2).png


우리나라 회화 속의 ‘거북’은

선사시대 암각화 이후

고구려 고분벽화 속 ‘사신’의 하나인

‘현무’의 모습으로 처음 나타났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분(古墳)의

벽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6∼7세기에 최전성기를 맞는데,

주로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 집안과

평양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사신도>는 해와 달, 사방위 별자리와

함께 나타나며,

중국과 마찬가지로 천문과 지리의

사방위 우주론을 구축하는

중요한 도상이었다.


초기 고분벽화는 4∼5세기에 만들어졌고,

묘주의 초상화와 그 당시 풍속 등이 그려졌다.

중기는 5∼6세기로 묘주와 관련된 인물 풍속 및

<사신도>가 그려졌고,

후기는 6∼7세기로 <사신도>가 주요 제재로 그려졌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고구려의 정치·군사·사회·

문화적 상황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으로

고분을 통해 그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광대하고 강력했던 나라였다.

정치적으로 대제국을 건설했던 고구려는

사회적·문화적인 면에서도

당시 한반도 남쪽에 있던 신라나 백제보다도

앞서 나갔으며 주변의 여러 나라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막강한 국가였다.

또한 중국과 서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불교와 도교 사상을 수용하는 등 호방하고

진취적이었던 고구려는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을 첫 도읍지로 하는 작은 국가로

시작하여 제2대 유리왕 22년(AD 3년)

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여건이 좋은

압록강 유역인

국내성(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으로

천도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 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국내성은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427년)하기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로써

고구려의 체제 정비를 하면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정세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국내성은 산골짜기에 위치해

터가 좁았고 외부와의 교류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


광개토왕(374∼412(?))은 즉위(391년) 후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군사·외교는 물론 사회·문화 분야로까지

정책을 확대해 추진해 나갔다.

백제와의 전쟁의 승리로

임진강 방면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왜구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도와

영향력을 행사했다.

서쪽으로는 요동을 차지하여

옛 고조선의 땅을 회복했으며,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또한 그는 한반도 남쪽으로의 진출을

위해 평양을 남쪽의 중심 도시로 개발하고

불교 신앙의 거점으로 삼았다.


광개토왕 사후 즉위한 장수왕은

장수왕 15년(427년) 옛 고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염원과 오랫동안 국내성 중심으로

힘을 키워온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세력을 등용해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평양 천도를 단행한다.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넓은 평야 지역으로

경제적 기반이 탄탄하고 문화적으로 발달한

도시였다.

평양에서는 서역이나 중국에서 온 승려들이

불교 신앙을 가르쳤고 불교문화와 함께

서방 문화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혼란스러운 북중국에서 망명해온 한인이나

호족들을 받아들이면서

중국의 오랜 신화·전설들도 수용하면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문화도 함께 섞이면서

평양은 다양한 문화가 습합되는

국제적인 곳으로 성장하게 된다.

장수왕 통치 시기

고구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최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장수왕이 서거(491년)하자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북위에서도

장수왕의 죽음을 애도할 정도로

고구려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였다.

6세기 전후해서 동아시아는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고

안정된 정치·사회를 바탕으로

사회·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졌다.

남조와도 교류도 활발해져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그 영향이 나타난다.


이와는 반대로 국내성 지역은

보수성과 지역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고구려는 시간이 흐르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간의 세력 다툼으로 혼란해지며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한 대응할 힘을 잃게 된다.


고구려의 이러한 특성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고분에 그려진 벽화이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일대의

통구 지방 (현재 집안)과

평양 등지에 수많은 고분을 남겼으며

현재 80여기의 고분벽화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벽화가 있는 고분들은

대체로 규모가 크며,

벽화는 묘실의 벽면과 천장에 그려져 있다.

고분의 규모로 봤을 때,

고분을 조성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권력과 재력을 모두 갖춘 사람들만

가능하였기에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러한 왕족과 귀족들은

현세의 부귀영화와 권세를 내세에서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계세(繼世)사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주로 3시기로 구분하는데,

초기는 4∼5세기, 중기는 5∼6세기,

후기는 6∼7세기로 나누며

초기에는 묘주의 초상화와 생활도가,

중기에는 묘주와 관련된 인물풍속도와

사신도가,

후기에는 사신도가 주를 이루었다.


초기 고분의 벽면에는 현실 세계를,

천장에는 신선, 일월성신, 신수 등 천상계나

내세를 나타내는 요소들이 묘사되었는데,

시대가 흐를수록 천장에 그려지던 ‘사신’이

아래로 내려와 네 벽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는 도교 사상과 음양오행설이

왕실이나 귀족 사회에 만연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영류왕 7년(624년), 2월에 왕이 사신을 당에

보내 책력을 발급해 줄 것을 청하자,

형부상서 심숙안을 보내와-중략-

도사를 시켜 천존상 및 도법을 가지고 와

노자를 강론하게 하였다.


보장왕 2년(643년), 3월에

개소문이 왕에게 고하기를

“세 가지 교법을 비유하자면-중략-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성하고 있으나,

도교가 성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청하오니,

사신을 당에 보내

도교를 위해서 나라 사람들을 교화하소서”라고

하였다.-중략-당 태종이 숙달 등 여덟 사람을

보내주고, 겸하여 노자의 '도덕경'을 내려주었다.

왕이 기뻐하여 승려의 사찰을 빼앗아

그들에게 도관(道觀)으로 쓰게 하였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중기(450∼550년)의

후기에 속하는 고분부터 <사신도>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며,

<사신도>가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후기(550∼650년쯤)로 분류하고 있다.


집안 지역에서는 통구 사신총, 통구 4호분,

통구 5호분,

평양 지역에서는 진파리 1호분, 내리 1호분,

강서대묘 등이 있다.


다음 장부터는

400여 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 지역과,

국내성에서의 천도 후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의 고분으로

나누어,

<사신도>가 그려진 고분만을 대상으로 하여,

시기별로 ‘현무’의 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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