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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구 May 18. 2023

DAY10. 타누스 강변을 걸으며

어제의 나에게, 오늘의 나에게

선글라스와 모자 에어팟을 챙겨 대항해시대의 전진기지였다는 <타누스 강>으로 향했다. 어제 도보 투어 덕택에 구글맵에 의존하지 않고 마치 동네 산책 나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시내를 가로질러 강으로 갔다.


한참을 걷다 강가 쪽 테라스에 하얀 테이블이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어떤 식당인지 검색하니 어제 리스본 시내에서 본 유명 맛집만 모아서 편집한 ‘타이아웃 마켓’에도 입점해 있는 ‘MONTE MAR’라는 해산물 전문 식당이다. 맛이 보장된 집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시키지도 않은 빵과 절인 올리브를 먼저 테이블 위에 놓는다. 공짜인지 물어보려다 그만뒀다. 이어 주문한 와인이 나왔다. 새우튀김과 마늘 볶음밥은 한참을 지났는데 안 나온다. 더딘 서빙이 되려 고맙다. 일정한 주기로 강물이 방파제에 부딪힌다. 하얀 삼각형 돛대를 세운 요트가 여유롭게 지나고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은 조금 더 빠르게 지나간다. 멀리 <4월 25일 다리>와 그 너머에 브라질에서 카피 한 그리스도상이 손에 닿을 듯 보인다. 다리 못 미쳐서는 컨테이너 선이 정박해 있다.


햇살에 반짝이는 강을 보며 와인 한 잔을 천천히 다 마시고 나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내가 들어올 때만 해도 한 테이블 밖에 없었는데 지금 보니 꽤 여러 테이블에 손님이 있다. 손님과 종업원이 생선 한 마리를 앞에 두고 흥정을 하는지 조리법에 대해 얘기를 하는지 한참이 수다스럽다.


와인 한 잔을 더 시켰다. 그제야 식사가 나왔다. 느리게 점심 식사를 했다. 입구 쪽을 보니 팔뚝이 건장한 직원이 하몽을 삐지고 있다. 하몽은 썬다는 표현보다 칼로 어슷하게 삐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얇게 삐진 불그스름한 하몽을 파란 멜론 위에 정성스레 올려놓는다. 아침 식사 때 하몽을 생각했다. 어제 호텔 조식으로 먹은 스크램블이 너무 짜서 오늘은 베이컨은 빼고 햄과 치즈를 넣은 스크램블을 시켰는데 여전히 짰다. 문득 짠 하몽과 멜론을 같이 먹는 장면이 떠올라 멜론과 파인애플 위에 스크램블을 조금씩 올려서 먹었다. 한국인의 창의력이 이런 것이다.


리스본 타누스 강변


아주 긴 식사를 하고 나른해져 숙소로 다시 돌아갈까 유혹도 있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닮은 ‘4월 25일 다리’ 쪽으로 걸었다.


문득,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어떤 충고를 할까 생각해 봤다. 생각 없이 걷자고 했지만 내가 좀 걸어봐서 아는데 생각 없이 걷는 게 쉬운 게 아니다. 아무 생각이 없으려면 네다섯 시간 이상 계속 걸어야 가능하다.


막막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던 한 시골청년이 이제 어느새 중년이 되었다. 과거의 나는 너무 여럿이어서 5년씩 끊어서 강철구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있었던 ‘선택’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지금 그 선택의 결과를 알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몇 번 고민스러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후회가 없다는 건 여한이 없다는 것과는 다르다. 어쩌면 선택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선택의 순간이 아닌 선택 이후의 시간을 채우는 태도가 더 중요하겠지. 


선택 이후의 나의 시간들을 천천히 반추했다. 어제의 나에게 어떤 선택과 기준을 줄 수 있을까로 시작했는데, 되려 어제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묻는다. 지금도 여전히 그때처럼 회의하고 열망하고 뜨거운지.

선택과 태도, 무엇과 어떻게, 어제와 지금의 나, 미래의 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세 시간쯤 걸었을까. 오늘의 나는 그저 잠시 쉬면서 찬 맥주 한 잔을 하기를 권한다.


혼자 걸었더니 속도가 조금 빨랐나 보다.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타이머를 맞춰 놓고 낮잠을 잤다. 발코니 창을 열어 놓았더니 따듯해진 저녁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이 다리에 느껴져 기분 좋게 스르르 잠에 빠져 들었다. 잠을 깨니, 어릴 때 낮잠을 자고 일어나 텅 빈 집을 확인하곤 서럽게 울곤 했는데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외로움인가? 그렇다면 드디어 목적을 달성한 것인가.


일단 저녁을 먹자. 한국 식당 몇 곳과 현지 식당을 검색해서 하나씩을 골랐다. 두 식당은 호텔을 기준으로 서로 반대편에 있었다. 마음은 한국식당 쪽이었는데 발길은 현지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설픈 방향 감각이라니, 발길이 이끄는 데로 시내로 나와 해물밥으로 유명한 ‘UMA’ 식당으로 갔다. 새우와 맛조개 그리고 홍합과 조개를 넣고 쌀과 양념을 함께 푹 끓인 얼큰 자작한 탕밥이다. 얼핏 경상도의 김치죽, ‘갱시기’가 연상되는 비주얼이다. 주문을 하고 30분쯤 후에 나왔으니 그 시간쯤 졸이는 것 같다. 먹으면서 밥 알이 점점 퍼져서 구수함이 더해졌다. 구글 리뷰에 이런저런 평들이 많았었지만 내 입맛에는 괜찮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중국인이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연인처럼 보였다.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한다. 꽃게를 발라 먹다가 여성의 코 끝에 밥풀 하나가 묻었다. 분명히 봤을 것 같은데 남자는 밥풀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이게 ‘배려’일까 생각하며, 무시하기엔 너무 가까워 계속 거슬렸지만 더 이상 그쪽을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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