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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바람이 내게 묻는다_나, 무엇을 지켰느냐고….

호밀밭의 파수꾼_J.D. 샐린저

by 서수정


나는 종종, 책장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도는 문장이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홀든 콜필드의 말은 바람처럼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와 조용히 물었다.

“너는 무엇을 지키고 싶었니? 그리고 지금은, 무엇을 잃었니?”

홀든의 말이 아니었다.

그건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감춰둔 내 안의 아이가 던지는 질문 같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멀리 계셨다.

군인이셨던 아버지의 빈자리는 내게는 '말하지 못하는 외로움'이었고,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어린 동생은 그 외로움에 ‘질투’라는 감정을 덧씌워주었다.

나는 첫째였고, 그래서 참아야 했고, 이해해야 했고, 늘 ‘잘해야만 하는 아이’였다.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동시에 여전히 너무도 아이였던 나.

홀든 콜필드도 그랬다.

그는 자꾸만 세상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실은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는 아이였다.

가식적인 어른들 틈에서 진심을 갈망했고, 지켜내지 못한 동생의 죽음 앞에서 어른들의 무력함에 울분을 토했다.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홀든의 이 말이 가슴속에 오래 남았다.

호밀밭은 그가 지키고 싶었던 세상이었고, 그 안에서 뛰노는 아이들은 아직 타락하지 않은, 어딘가 순수했던 존재들이었다.

그가 지키고 싶었던 건, 결국 그 자신이었다.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무언가, 영원히 아이로 남고 싶은 그리움, 그리고 한때 자신이 가졌던 믿음…

나 역시도 그렇다.

돌이켜 보면, 나도 누군가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다.

동생의 웃음을 지키고 싶었고, 엄마의 한숨을 대신 짊어지고 싶었고, 그 속에서 내 마음 하나쯤은 접어두어도 괜찮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무엇을 지키는 일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많은 것을 흘려보냈다.


이제는 어른이 된 나에게 홀든의 물음이 다시 다가온다.

“너는, 지금은 무엇을 지키고 있니?”

나는 대답한다.

완벽하진 않지만, 나도 여전히 누군가를, 어쩌면 예전의 나를 지키려 애쓰고 있다고…

마음 한켠에 아직 어린 내가 있고, 그 아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오늘도 나는 조용히 손을 뻗는다.



“오빠는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어떤 학교도 마음에 안 들고, 백만 가지가 마음에 안 들고, 다 안 들잖아.”

“들어! 그게 네가 틀린 데야.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 우와 그 애가 나를 얼마나 우울하게 만드는지.


“오빠는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마음에 드는 거 한 가지만 대 봐 “

(…)

그러니까 꼬마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지도 않고 마구 달리면 내가 어딘가에서 나가 꼬마들을 붙잡는 거야.

그게 내가 온종일 하는 일이야. 그냥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그런 노릇을 하는 거지.

그게 미쳤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게 ㅐ가 진짜로 되고 싶은 유일한 거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마음을 알아채는 책을 덮는 일이 언제나 쉽지 않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단순한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기억들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다.

홀든의 방황은 나의 침묵을 닮았고, 그가 끝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은, 결국 나도 한때 지키고 싶었던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자라면서 무언가를 잃는다.

어쩌면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렸고 너무 늦게, 마음속 아이를 잊었다.

하지만 잊은 줄 알았던 그 시절의 나,

조금 서툴고, 눈물이 많고, 사랑받고 싶었던 그 아이는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아이가 오늘도 묻는다.

“그때 네가 지키고 싶었던 건 뭐였니?”

나는 이제야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이었어. 남들의 기대에도, 시간의 무게에도 휘지 않고 그대로 남고 싶었던 진짜 나 말이야.”

그렇게, 나는 아직도 파수꾼이고 싶다.

다 큰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도, 누군가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내 안의 호밀밭 어귀에 가만히 서 있고 싶다.

그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게,

그 누구도 울지 않게.

바람은 오늘도 그 호밀밭을 스쳐간다.

그리고 다시, 내게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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