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_가와바타 야스나리
여름날, 차가운 문장을 마주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이미 기차에 올라탄 듯했다.
하얀 세상이 펼쳐지는 그 풍경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계절과 정반대의 풍경이지만, 어쩐지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공간 같기도 했다.
여름의 무더위가 한층 깊어가는 시기에, 눈 덮인 산골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을 읽는다는 건 마치 더운 하루의 한가운데서 숨을 돌릴 얼음 한 조각을 가만히 입 안에 넣는 일과도 같았다.
[설국]은 설명보다 여운이 많았고, 감정과 풍경에 빠지는 책이었다.
정지된 듯 흘러가는 문장들, 삶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듯한 침묵 속에서 나는 어느새 나 자신의 속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요즘 나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조급함과, 멈춰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러다 보니 어쩌면 나는 ‘숨 쉬는 시간’을 잃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책 속 한 장면에서 시마무라는 요코의 시선을 이렇게 느낀다.
“요코의 눈길이 그의 이마 앞에서 타오르는 것 같아 어쩔 바를 몰랐다. 그건 마치 먼 등불처럼 차갑다.”
그 표현은 마치 한여름에 마주친 차가운 바람처럼, 그 자체로 나를 멈춰 세웠다.
우리는 때로 뜨거운 감정보다, 차가운 응시 속에서 더 깊은 감각을 깨닫게 된다.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 설명되지 않은 아름다움, 그리고 어떤 감정의 끝자락에서 마주치는 무력감 같은 것들이 삶의 가장 섬세한 결을 이루고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감정선보다도, 나는 이 소설이 전해주는 시간의 결이 더 오래 남았다.
사건도 없고 결말도 뚜렷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이야기를 ‘읽었다’는 느낌보다 ‘지나왔다’는 감각으로 기억하고 싶다.
책을 덮은 뒤에도 그 여운이 오래 남았고, 어느 날 창밖의 바람을 보며 문득 생각나는 한 장면이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내 삶 속에 한 자락 자리를 내준 셈이다.
후반부에서 시마무라가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느끼는 순간은 특히 인상 깊었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가만히 떠오르는 듯한 감정, 어디에도 닿지 않지만 몸을 들어 올리는 어떤 기운, 그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누구나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삶과 삶 사이, 현실과 꿈 사이 어딘가에서 매일 은하수를 바라보며 잠시 떠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내 일상 속 ‘숨 쉴 틈’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책을 읽는 시간, 차를 마시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짧은 정적.
그 모든 순간이 무의미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그 사이사이에서 내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설국]은 바로 그런 시간을 가능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소란스럽지 않지만 깊고, 가볍지 않지만 무겁지 않은 온도의 감정.
삶은 거창한 계획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속에서, 그저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순간들이 더 깊고 오래 남는다.
[설국]은 내게 그런 하루를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숨이 차고 마음이 지칠 때,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괜찮은 오후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멀리 떠나지 않아도 좋다. 오늘 당신이 읽는 한 줄의 문장, 마시는 한 모금의 차,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창밖의 나무 하나가 우리를 천천히 회복시키는 은하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여름을 위한 마지막 한 줄
“당신이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고, 오늘 하루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책 속의 한 문장이 말해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더운 삶 속의 작은 설국 한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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