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서 연민으로, 인간됨의 서사시

일리아스_호메로스

by 서수정
“노여움을 노래하라,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그 노여움을.”


이렇게 시작되는 [일리아스]는 단지 오래전 전쟁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감정에서 비롯된 파장이 얼마나 거대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인간 탐구의 서사다.

이야기의 시작은 아킬레우스가 모욕을 당하고, 깊은 분노에 휩싸이면서 시작된다.

명예를 중시하던 그는 자신의 여인을 빼앗기고 모욕을 당한 순간, 전장에서 물러나며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한다.

한 인간의 감정이 한 나라의 운명을 흔드는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존재를 구성하는 축이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의 안락보다, 죽은 뒤에도 남는 이름을 택했다.

그래서 그들은 명예를 위해 싸웠고, 분노는 그 명예가 위협받을 때의 가장 격렬한 반응이었다.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은 전쟁에서의 싸움만이 신과 인간이 얼마나 용감하고 영웅이 되는 중요한 지표였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그 누구도 전장으로 불러오지 못했지만, 결국 아킬레우스는 전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계기로 복수를 택한다.

그는 헥토르를 죽이고, 시신을 마차에 묶어 질질 끌며 잔인한 복수를 감행한다.

나는 그가 그토록 위대했던 전사에서, 차갑고 무자비한 분노의 화신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그 파괴의 끝에서 뜻밖의 장면을 보여준다.

죽은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는 장면.

그 순간 아킬레우스는 멈춘다. 복수가 아니라 연민이 그를 흔든다.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는 적의 아버지와 인간적으로 마주한다.

분노의 화신이었던 아킬레우스가 비로소 인간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일리아스]의 시대는 지금과는 달랐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신과 인간이 함께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었고, 개인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했다.

삶은 언제나 전쟁과 운명의 한복판에 있었고,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명예의 완성이었다.


[일리아스]가 오늘의 나에게 건넨 질문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질문을 건넸다.

그것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표출은 정당 했는지와 나는 과연 죽음을 준비하면서 짧지만 영웅적인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길고 편안한 삶을 선택할 것인가였다.

각자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나는 그의 분노의 표출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친구의 죽음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죽음을 가져왔기에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거나 잃어버리는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분노했을 것이다.

나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느냐가 중요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질문은 나의 삶의 자세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인데….. 나는 사실 한 번의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경험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길게 사는 삶보다는 지금 이 순간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아가길 바라왔다.

그렇게 된다면 어느 시간에 죽음이 닥쳐올지라도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고 생각하며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서사시는 분노로 시작해, 인간성 회복으로 끝난다.

아킬레우스는 가장 위대한 전사였지만, 진짜 영웅이 된 것은 칼을 들었을 때가 아니라 칼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우리는 지금 어떤 전장을 살고 있을까?

누군가의 말 한마디, 내면의 상처, 경쟁 속의 모멸감 속에서 작은 ‘전쟁’을 벌이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그 분노를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 멈추고 연민을 선택할 용기는 있는가?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당당한 용사가 되길 바라고 있다.


[일리아스]는 인간을 찬양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고귀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매일 아킬레우스처럼 분노할 수 있고, 헥토르처럼 두려워하면서도 맞설 수 있으며, 프리아모스처럼 용서를 구할 수 있다.

그 모든 복잡한 선택 안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이라는 이름을 다시 써 내려가는 것이다.

요즘은 하루가 너무 분주 복잡하다. 나를 돌아볼 시간도 없이 쫓겨 살아간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용기는 꼭 필요하다는 것을 ….

그것을 정리하고 내가 가장 아끼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위한 다른 것을 정리하며 멈춰야 하는 용기를 갖아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무슨 이런 복잡한 전쟁사가 고전의 고전이라고?‘ 하며 구시렁대었었다.

하지만 요즘 고전을 읽는다는 맛을 알아가고 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지금의 나를 들여다 보는 거울인 것도 알게 되는 기회가 되고 있다.


우리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라도 허리 펴고 하늘 한 번 바라보며 숨을 쉬어보면 어떨까?

그곳에서 나를 보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나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용기,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우리를 멈추게 하는 시간을 갖아보자.

내 삶의 시간들이 나를 위로하고 어루만져 줄 것이라 믿는다.


덧) 오늘은 하루가 병원 투어로 통째로 날려 버린 것 같아요. 늦게 글을 써서 올리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밤 평안을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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