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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May 25. 2023

그럼에도 '감사'

CRPS 환자의 투병 에세이 23

질병 때문에 곁에 놓여 있을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통증으로 다리 하나를 사용하지 못하지만, 감사한 점들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끝을 알 수 없는 깜깜한 터널 속에도 감사한 것들은 넘쳐났다.


병원투어를 하지 않음에 감사했다. 집과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에 갔을 뿐인데 CRPS 환자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병원이었다. 덕분에 케이스가 많아, 믿고 치료받을 수 있었다.

아프기 시작한 2018년도에는 CRPS를 진료조차 보지 않는 대학병원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병원과 의료진을 찾아 헤매지 않고 바로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통증으로 움직이기 어려웠는데,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지 않아 체력을 아낄 수 있었다.


병원과 집이 가까운 사실에 감사했다. 집과 병원이 가까운 덕분에 매일 같이 병원에 가서 시술받고 주사 맞는 과정이 덜 부담되었다. 주사 치료를 마치면 온몸이 지쳐버린다. 그 때마다 빠르게 집에 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치료의 횟수 또한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돌발통이 올 때면 응급실을 가야 했는데 다니는 병원이 근방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이외에도 급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동네 병원 가듯이 대학병원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은 행운이었다.


가장 적절한 때에 다양한 치료를 받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CRPS 또한 치료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 대상포진 치료*를 받은 감염내과에서 통증이 지속될 경우, 마취통증의학과에서 진료 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 덕분에 바로 마취통증의학과에서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빠르게 치료를 시작해서 받을 수 있는 치료의 폭이 넓었다. 신경차단술 종류를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하고, CRPS 재활치료를 입원과 통원을 반복하며 시행했다. 호전의 첫 발걸음이 되어준 척수자극기*를 신경외과에서 삽입하게 되었는데, 이는 신의 한 수였다.


진심을 다해 진료 봐주시는 담당 교수님들을 만났음에 감사했다. 다양한 진료과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마취통증의학과, 신경외과, 재활의학과, 정신건강의학과, 혈관외과, 소화기내과, 피부과 등 수많은 진료과의 협진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든 교수님들이 나의 '통증 호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같이 고민하고 힘써주셨다. 희귀병이라 정해진 치료법이 없는 상황 속에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 주셨다.


CRPS 통증으로 예민해 있던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병원 의료진분들과 직원분들을 만났음에 감사했다. 주사실 간호사 선생님들은 '우리는 친척보다 더 자주 보는 사이'라며, 나의 표정만으로도 그날 상태가 어떤지 아셨다.

병원 창구 직원분들, 병원 내 곳곳에서 도움 주시는 직원분들, 교통 정리해 주시는 직원분들까지 나의 안부를 물어봐 주셨다. 병원을 갔다 오면 고향에 다녀온 것 마냥, 통증으로 지쳐있던 마음이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관계가 깊어진 의료진분들과 직원분들은 나의 호전된 상태를 보고 눈물 흘리며 말씀하셨다.

"소민님이 좋아졌다니까 제가 다 좋아서 눈물이 나요.
꼭 더 좋아지실 거예요! 무조건 좋아질 거예요!!"


CRPS는 희귀 난치질환이라 산정특례* 적용이 되지만, 사실 비급여 치료가 더 많다. 치료비에 신경 쓰지 않고,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허락되어 감사했다.

청년의 때에 경제적 활동이 멈추었음에도, 가족들의 지원 덕분에 부족함 없이 치료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치료뿐 아니라 통증 호전에 도움이 된다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수많은 분들이 계심에 감사했다. 사람은 큰 시련을 당할 때 인간관계가 정리된다고 한다. 그런데 내 곁에는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는지 고마운 의문이 들 만큼 든든한 사람들이 있었다.

동굴 속에 들어가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음에도, 계속해서 기꺼이 그 문을 열고 들어와 묵묵히 곁을 지켜주었다.


24시간 내내 밀려오는 통증 가운데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순간이 필요했다. 좋아하던 것들을 되찾아 보려 했다. 웃음은 사람에게 큰 힘을 준다고 믿었다.

당장 오늘 하루를 살아 버티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그 안에서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가는 건 나의 몫이었다.


웃음을 찾기 위해 취미활동을 시도했다. 아프기 전 나의 취미활동은 모두 활동적인 것들만 있었다. 운동을 좋아했고,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통증 부위가 ‘발’이었기에 기존에 하던 취미활동을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두 발을 사용하지 못하면, 두 손을 사용하면 된다.

새로운 삶을 찾는 여정 같았다. 이제까지 앉아서 하는 취미활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처한 현실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아 나갔다.


독서부터 시작했다. 읽고 싶었던 책들을 전부 읽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현실은 손으로 종이책 한 장 넘기기 어려운 통증이 밀려왔다. 포기하지 않고 좋아하는 분야의 책부터 읽어나갔다. 추가로 뇌 신경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통증을 이해하려 했다.


오랜만에 퍼즐을 다시 해보았다. 다 완성하면, 유액으로 굳혀 하나의 작품처럼 보관하였다. 통증과 싸우며 만들어 낸 결과물을 보며 '난 좋아질 수 있다'고 의지를 다졌다.

어릴 적 조립하는 것을 좋아했었기에, 건담 조립도 하게 되었다. 건담 종류는 모르지만 부품 하나하나를 이용해 완성하는 재미가 있었다.


뜨개질에 도전해 보았다. 전혀 관심 없는 분야였음에도 손으로 해볼 수 있는 활동은 전부 해보고자 했다.

사실 나의 이미지는 뜨개질과 거리가 멀다. 내가 뜨개질을 한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이때의 도전 덕분에 지금도 우리 집 수세미는 'hand by 소민' 제품으로 이용 중이다.


드디어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설레게 하는 취미 활동을 찾았다. 바로 레고이다. 타고난 공대생 기질을 가진 나에게 딱딱 맞추어 떨어지는 레고 조립은 큰 흥미를 유발했다.

통증이 심해 앉아있을 수조차 없어 하루에 최대 30분가량 할 수 있었다. 30분 동안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평균 2000개가 넘어가는 피스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여정 속에서 신이 났다. 통증을 무시하고 더 하고 싶을 만큼이나 레고는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잠깐이나마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핸드폰만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 보고만 있는 것'보다 '두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활동'을 계속해서 찾아 나가려 했다.


이제까지 내가 사람이기에 해왔던 모든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청년의 때에 건강하게,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며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두 눈을 통해 보고, 두 손과 두 발을 이용하고, 음식을 소화시키고, 밤이 되면 잠을 자는 등 모든 일상생활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신체 기관들이 당연하게 그 기능대로 사용되길 바라는 것은 교만이었다.


두 발을 이용해 걷지 못한다 해서 좌절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아프기 이전 두 발을 이용해 걸어 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또한 엘보클러치나 휠체어 등을 이용해 움직일 수 있는 상황에 감사했다.


나의 의지로 통증은 조절되지 않지만, 나의 의지로 생각은 변화시킬 수 있었다.



*대상포진 치료: (이전 글 참고) 대상포진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척수자극기: (이전 글 참고) 30살. 몸속에 기계를 넣다 

*산정특례: 국가가 암환자, 중증 희귀 질환자 등에게 본인부담률을 경감해 주는 제도. 급여 부분에서 90%를 공제해 준다. 환자는 '급여 부분의 10% + 비급여 부분 + 약값'을 부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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