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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Jul 13. 2023

불가능은 없다

CRPS 환자의 투병 에세이 26

CRPS로 투병하며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중 다시는 절대 못할 거라 생각했던 4가지가 있다.

1) 운전
2) 드럼
3) 자전거
4) 수영


모두 나를 웃게 만들어준 활동이었다. 이 행복을 다시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찾아왔다.

통증으로 걷지도 못하면서, 꼭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이 4가지 활동이 그토록 하고 싶었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의 차이는 컸다.

1) 운전

나의 통증 부위는 오른발인데 운전은 오른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행위이다.

운전이 불가능한 이유는 크게 2가지였다. 첫째, 이미 오른발은 강직이 진행되어 액셀이나 브레이크 페달을 세밀하게 조작할 수 없었다. 통증이 심해지면 경련까지 오는 상황이었다. 둘째, 페달을 밟고 있는 동안 미세하게 전해지는 진동조차 통증으로 느꼈다.


왼발 또는 두 손을 이용하여 운전하기 위해 장애인용 차량을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CRPS 장애 인정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라 불가능했다.


일주일에 4~5번은 대학병원에 가야 했는데 집과 병원이 가까운 탓에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통증으로 몇 발자국 걷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집 밖을 나가 택시를 직접 잡을 수는 없었다.

언제 병원에 갈지 모르는 나를 위해 부모님이 24시간 대기조로 계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운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부터 병원까지 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기에 도전해 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2020년 9월. 조심스레 운전 연수를 다시 시작했다. 도로 위의 폭탄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강사님의 지도 아래 가능한지 여부를 파악했다. 몸에 무리가 되지 않을 만큼 반복해서 연습했다.


담당 교수님께 '직접 운전해서 병원에 왔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정말 축하하지만 이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하지 않기를 권하기도 하셨다.

가벼운 접촉사고만 나도 통증이 온몸으로 퍼질 수 있고, 몸 안에 기계가 있기에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교수님 말씀이 백번 옳았지만, 아프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도 컸다. 어렵게 되찾은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택시를 애타게 기다리거나 가족의 도움 없이 혼자 병원 다니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행복을 이어가고 되찾기 위해 모두에게 걱정 끼치지 않을 만큼 호전되어야만 했다.


안전하게 운전하기 위해 발의 강직이 풀리도록 더 집중해서 재활치료에 임했다. 오른발의 발가락, 발등, 발목 등 모든 부위가 세심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더 높은 강도로 재활운동을 진행했다. 페달을 밟고 있는 동안 찾아오는 진동까지 버틸 수 있도록 자극훈련을 병행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어주었다.


2) 드럼

드럼은 대학생 때 가장 열심히 한 취미활동이었다. 대학교 중앙락밴드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대학 생활 시간 대부분은 밴드 연습 및 공연으로 가득 채워졌다.

몇몇 교수님은 농담 삼아 "소민이는 드럼 치러 대학교에 들어왔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드럼은 취미생활을 넘어 열정 넘치는 나의 대학생활이 담겨있었다.


드럼은 오른발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페달을 밟아야 하는 악기이다. 평생 하지 못할 거라 판단한 이유는 운전과 유사했다. 추가로 페달을 밟을 때마다 찾아오는 진동은 엄청났기에 다시 드럼 치는 모습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발을 사용하지 않는 악기로 드럼의 부재를 채워보고자 했다. 어릴 때부터 해온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해 보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2021년 3월. 학원에 가서 상황을 말씀드리고 조심스레 다시 드럼 앞에 앉았다. 드럼 연주를 목표로 하기보다 하나의 재활이라 생각하고 임했다.


아주 조금씩 발로 밟을 수 있는 힘의 강도를 올려나갔다. 원하는 대로 발이 움직여주지 않기도 했다. 예전처럼 빠르고 파워풀한 음악을 할 수는 없지만 다시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꿈만 같았다.

음악에 맞추어 드럼을 치는데 눈물이 떨어졌다. 질병으로 인해 할 수 없을 거라는 사고 안에 갇힐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드럼연주를 하는 동안 찾아오는 강한 진동은 통증을 야기시켰다. 연주를 마치고 쉬어도 한번 악화된 통증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아쉽지만 몇 달간의 수업 끝에 더욱 건강한 미래를 위해 여정을 멈추었다.

'아프지만 내가 드럼을 칠 수 있구나!'라고 인지한 것만으로도 마음속 응어리가 풀렸다.


3) 자전거

한강에서 자전거 타기는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 중 하나였다. 바람과 함께 탁 트인 한강을 바라보며 라이딩하는 동안 마음이 뻥 뚫리고 행복했다.

바람을 느끼며 행복했지만 이제 바람은 내게 통증이 되어버렸다. 지면의 울퉁불퉁함마저 통증으로 느끼는 상황 속에서 자전거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혹여 누군가와 부딪치거나 급정거해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CRPS 재활 중 기본 유산소 운동은 실내 사이클이다. 매일같이 집과 재활치료실에서 한강에서 자전거 타는 모습을 떠올리며, 아무리 아픈 날에도 이 악물고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다시는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지 못할지언정, 그만큼의 체력이라도 키우기 위해 적게는 10분부터 많게는 1시간까지 매일 땀과 눈물을 흘려가며 운동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2022년 6월. 나는 다시 한강에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아픈 이후 가장 행복했던 날 중 하루였다. 감격, 감동, 기적. 그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집에서부터 잠실대교까지 왕복 32km를 자전거로 타고 갔다 왔다. 잠실대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기쁜 소식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며 행복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시작한 눈물은 한이 쏟아져 나오듯 펑펑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멈출 수 없었다.


차마 그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행복과 감사가 넘쳐흘렀다. 이를 위해 처절하게 투병하고 재활했던 지난 몇 년간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잊었던 행복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통증 속에서 싸워야 했다. 버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누구보다 독하게 이 악물고 재활치료에 임했다. 환자로서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며 고백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4) 수영

유난히 운동을 좋아했는데 그중 수영은 꾸준히 했던 운동 중 하나이다. 물속에서 땀 흘리며 수영할 때의 쾌감을 즐겼다.

현실은 물이 닿는 것마저 통증으로 느끼고 있는 CRPS 환자였다. 다시 수영하는 그날을 떠올리며 물을 통증으로 느끼지 않도록 꾸준히 수중재활을 시도했다.


하지만 CRPS 통증 부위는 살이 붓고 터지며, 발톱이 깨져있다. 터진 피부 사이로 감염되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아직까지 수영은 시도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시도할 때마다 득과 실을 따져보는데, 감당해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판단을 내렸다.


피부가 온전해지는 그날 자유로이 수영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물을 통증으로 느끼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한계를 스스로 정할 필요는 없다.


4가지 중 현재 수영을 제외한 운전, 드럼, 자전거 타는 활동을 다시 해낼 수 있게 되었다. CRPS로 인해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한 행위들을 해낼 때마다 두꺼운 벽을 깨는 감동이 몰려왔다.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기적은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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