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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Jun 28. 2024

국가가 인정한 중증 희귀질환자

여기, 저 살아있어요

2018년 여름부터 시작된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말 그대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2019년 3월 5일, 나는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이라는 중증 희귀난치병을 확진받고 산정특례* 등록을 마쳤다.

그 이름마저 낯선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은 신경계 질환으로 극심한 통증이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질병이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통증 지수를 0점에서 10점까지로 나눌 경우, 출산의 고통을 7점으로 보는데 CRPS는 9~10점의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이러한 고통은 손발을 자를 때의 고통보다 더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CRPS

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을 24시간 내내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질병이라 할 수 있다.          

CRPS 확진에는 여러 절차가 필요하다. 담당 의료진은 먼저 환자의 상태가 ‘세계통증연구학회 진단기준’이 제시하는 항목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한다. 이는 통증 부위에 나타나는 증상이 다른 질병으로 인한 것이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서이다. CRPS가 아닌 다른 질병일 가능성을 하나씩 소거해 나가는 것이다.

동시에 환자가 CRPS만이 특징적으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항목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여러 검사도 진행된다. 외부자극이나 기저 질환에 의한 급성 통증과 구분되어야 하므로 치료를 받기 시작한 후 6개월이 지나고 난 뒤에야 검사 결과에 따라 CRPS 확진이 내려진다.


통증 발현 부위인 내 오른발은 아주 미세한 자극에도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로 그 많은 검사를 받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통증의 원인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고 되뇌며 가능한 한 담담하게 검사에 임했다.

“CRPS가 맞습니다.”

담당 교수님의 최종 진단이 내려졌다.


‘CRPS 확진’은 생각보다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다. 이미 받을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통증은 무섭도록 심해졌기 때문이었을까. 통증 발현 후 6개월 만에 멀쩡한 두 다리와 두 발로도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확진 여부와 관계 없이 이미 나의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뒤였다.

다른 CRPS 환자들은 확진받은 순간 더 이상 좋아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힘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대로 확진 후에는 산정특례 등록이 되어 국가의 의료비 지원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업재해나 교통사고, 의료사고 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CRPS 확진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내가 CRPS 확진을 받고 난 뒤 달라진 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첫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이유가 ‘CRPS라는 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족은 물론 가까운 지인들은 발병 후 갑자기 달라진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더군다나 확진 이전의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원인도 모른 채 치료만 받는 상황에 모두가 걱정을 넘어선 답답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CRPS 환자라서 이렇다.’는 책임감 없는 답변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사실 CRPS는 원인을 모르는 질병이라 더 큰 문제에 봉착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둘째, 주변 사람들로부터 치료에 관한 온갖 권유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프기 시작한 후,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병원과 의료진에 대한 정보가 수도 없이 쏟아졌다. 어쩔 수 없이 등쌀에 떠밀려 찾아가면 해당 병원 의료진은 내 질병명을 듣자마자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답변을 내놓을 뿐이었다. 오히려 CRPS 환자는 처음 봐서 신기하다며 나의 통증 부위인 발을 살펴볼 수 있는지 물어보는 의사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걱정하는 마음으로 나와 부모님에게 강권에 가까운 권유를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 그런 제안들은 참 힘들었다. 움직이는 행위 자체가 통증이었던 나를 두고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을 의지가 없는 사람인 양 매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숨겨진 명의, 숨겨진 병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생 살면서 이렇게 희귀한 질병에 걸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나 큰 병에 걸리면 ‘왜 꼭 나여야 할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듯 나 또한 그랬다. 그런 병은 따로 걸리는 사람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아닐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겨내야만 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였기에 CRPS 확진을 받고 이 병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 들었을 때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훗! 이번 어려움도 잘 극복해서 또 하나의 고난을 극복해낸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며 희망찬 미래를 꿈꿨다.

이 마음가짐은 불과 1년이 채 가지 못했다.


생일이 연말에 있어 매해 생일마다 한 해를 정리하며 짧은 글을 적곤 한다. 아프기 시작한 28살 생일에 적은 글은 ‘나에게 온 시련을 열심히 이겨 내서 다시 웃자!’였다. 다음 해인 29살 생일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생일’이라고 짧게 적었다.

29살 생일 케이크의 초를 불며 펑펑 울었다. 평범한 내 또래라면 20대의 마지막 생일이라는 아쉬움 정도를 느꼈을 테지만 나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과 보내는 내 인생의 마지막 생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 후로 몇 번의 생일을 더 맞이할 수 있었고, 지금은 다음 생일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간혹 통증이 호전될 때면 나는 나에게 내려진 CRPS 진단에 의심을 가지곤 했다. ‘그렇지, 내가 희귀 난치병 환자일 리가 없어! 검사가 잘못되었던 건 아닐까? 그때 내 뇌가 잠시 이상해서 그 순간 통증을 너무 세게 느꼈던 건 아닐까? 내가 엄살이 심했던 건 아닐까?’ CRPS가 아닐 수 있는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래. 내가 CRPS 환자가 맞구나.’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CRPS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

내 기준에서 가장 심한 저주의 말은 바로 ‘CRPS에 걸려!’이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조차도 그에 비할 것이 아니다. 차라리 죽는 것은 그 삶이 끝나기 때문에 잔인하다고 할 수 없다. CRPS 환자는 쉽게 죽을 수도 없다. 살아 있으면서 지옥에서나 경험할 법한 고통을 매일, 매 순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 통증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숨쉬는 것조차 벅찬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인터넷에서 CRPS를 검색했을 때 가장 흔히 사용되는 ‘저주받은 병’이 내가 겪어본 바 최적의 표현이었다.


CRPS는 사람이 절대 걸려서는 안 될 병이었다.  

             


* 산정특례: 암 환자, 중증 희귀 질환자 등을 대상으로 국가가 진료비 본인부담률을 경감해 주는 제도로 급여 해당 부분의 90%를 공제해 준다. 환자는 ‘급여 부분의 10% + 비급여 부분’을 부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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