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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y 29. 2024

폭우가 지난 뒤의 꽃

책장을 정리하며...

폭우가 지난 뒤의 꽃 / 헤르만 헤세


우애 있게, 모두 한쪽으로 바람에 몸을 숙이고, 물방울을 떨구고 섰다.

두려움에 위축된, 비바람에 눈이 먼

여린 것은 꺾여 쓰러져 있다.


아직 멍한 채로 주저하며 서서히

꽃들은 다시 그리운 햇빛 속으로 고개를 쳐든다.

우애 있게. 최초의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적이 우리를 삼키지는 않는다.


이 광경을 보자 나는 기억이 난다.

어두운 삶의 충동 속에서 보낸 숱한 시간들이, 어둠과 궁핍에서 벗어나 자신을 추스르고 감사와 사랑으로, 온화한 빛을 향하던 때가.




  책장을 정리했다. 나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책을 한 권 두권 사다 보니 꽤 여러 권이 되었다. 비어있는 공간이 없다. 한참 중국어에 관심이 있어 배우던 때가 있었다. 대만에서 머물다 오신 강사님의 통통 튀는 억양에 매료되어 중국어 교재와 카세트테에이프까지 사들이고 열심히도 했었다.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재미있었지만 할수록 어려웠었다는 기억밖에는. 요즘은 소오생 작가님의 글로 그때 배운 중국어를 소환하는 중이다. 그만두면서 정리를 했는데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상담 관련 자료들이다. 11년을 했으니 많기도 하지만 상담이란 배워도배워도 끝이 없다.


  결국 오랫동안 꽂혀있던  잡다한 상담활동지와 관련 교재들을 모두 끄집어내었다. 하나하나 넘겨보며 버려야 할 것과 그래도 무슨 미련에 아직은 품고 싶은 것들로 분류하다 한 장의 시가 내손에 들어왔다. 누구의 시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아마도 상담자료로 썼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짧은 만남의 시간 동안 학생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온갖 자료들을 모으고 관련 공부를 하며 열정을 불태웠던 흔적들이 책꽂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나고 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뒤늦은 학업에 온 열정을 쏟아부었던 시절이다. 한 점의 후회도 없이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가장 나를 사랑했던 시간들이었다. 또 한편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담교사를 끝으로 학교를 나오며 배우게 된 통기타 관련 책들이 여러 권 있었지만 그것들은 손을 대지 않았다. 언젠가는 기타 케이스 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는 통기타를 다시 흔들어 깨워 튜닝을 하고, 그리운 날들을  읊조리세월도 낚아볼 요량이다. 그렇게 함께 했던 책들 일부를 걷어 내고 글쓰기를 시작하며 모여진 책들로 책장을 가지런히 채워주었다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지는 날들 속에서 이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려 한다. 기억 저편의 궁핍했던 시절들이 나의 발판이 되고,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했던 그 순간들이 희망에 불을 켜는 씨앗이 된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하고 싶은 일들은 언제나 별빛 같은 미소로 유혹한다. 가보지 않은 길은 이제 두려움을 넘어 설렘으로 가득하다. 흐르는 세월들이 단단하게 하였고 당당하게 고개 들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저 책장의 책들과 이제 영원한 친구가 되어 좀 더 우아하게 잘 다듬어진 세계를 향해 발끝을 세워본다. 어두웠던 시간들 위에 아름다운 글꽃으로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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