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레비엔 Jun 26. 2024

백만원이나 80만원이나 거기서 거기

60만 원     

평온한 어둠 속에서 잠을 이룰 수 없게 무언가가 자꾸 반짝거렸다아까 본 비용 없이 자가출판으로 책 쓰기’ 광고였다책을 내는 비용은 무료였지만수업료는 20만 원이었는데백만 원 중에 20만 원쯤은 호텔이나 비싼 식당에 가는 것에 비하면 비싸지도 않았고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겠다어린 시절에 글쓰기는 언제나 칭찬을 받았었고언제 마지막으로 들어본 적이 있나 싶은 칭찬을 받을지도 몰랐다

백만 원 있는 사람이나 80만 원 있는 사람이나 다를 것 같지도 않다갑자기 몸이 더워지면서 이 강의를 신청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불도 켜지 않고다급히 아까의 광고 페이지를 찾아 들어갔다결제 버튼을 누르려다가그래도 혹시 몰라서 불을 켜고앉았다장소를 확인해보니 교통비를 들이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곳이었고우연히 본 책 쓰기 수업이 집 근처에서 한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면서운명 같았다. 

    

책 쓰기 수업에 대한 설명은 책을 왜 써야 하는지부터일정커리큘럼까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초저녁부터 온갖 생각에 지쳐서 수업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해도 잘 안 됐다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면어차피 갈 데도 없는데 시간도 요일도 중요하지 않다아직도 뭔가 좋은 일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다른 조건은 상관없었다수업의 질이 나쁘면갈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것이고글 쓰는 것 따위야 알아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깔끔하게 차려입고무언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잠시라도 생기는 것으로도 이득인 것 같았다수업은 유료지만책을 내는 데는 돈이 전혀 들지 않는다니 잘하면 책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이해도 되지 않는 복잡한 설명을 그만 읽기로 하고무작정 결제 버튼을 눌렀다계좌이체를 하는 단계에서 잠시 멈칫했지만망설이다가는 백만 원치의 인생마저도 근근이 버티다가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어차피 열심히 노력하고신중하게 결정한 일들도 잘된 일은 없었다충동적으로 결정해서 안 된다는 보장도 없다하고 싶은 일을 단 하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아침이 되어서세상이 가난과 절망부끄러움을 구석구석 찬란하게 밝히면이마저도 결제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백만 원짜리 인생이나 80만 원짜리 인생이나 거기서 거기다.

결제 버튼을 누르고서도 온갖 불안과 갈등을 떨쳐가면서이름을 쓰고주민번호를 입력하고 비밀번호를 쓰고지문 인증을 해가며 결제를 마쳤다핸드폰이 오랜만에 좋은 소식으로 울리면서결제 완료를 알렸다연달아 강의 관련 안내 사항이 문자로 길게 왔지만너무 피곤해서 아침에 확인하기로 하고 다시 불을 끄고 누웠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느꼈다오랜만에 먹고 사는 것 말고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결정을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처음 잠자리에 누울 때처럼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지만이번에는 기대감이 섞인 것이었다잠들기 직전에 통장 잔고는 백만 원이 아니고 80만 원뿐인데 20만 원을 써버려서 남은 잔고가 60만 원뿐이라는 것이 생각났다순간 화끈 열이 오르면서괜히 돈 계산을 해서는 100만 원이 있다는 착각에 20만 원을 썼다는 자책이 들었지만진짜 너무 피곤해져서될 대로 되겠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들었다바깥은 아직 어두웠지만차 소리와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5시 가까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비로소 잠이 들었다.     


아침이 다 돼서 잠이 들었기 때문에 점심때나 일어날 줄 알았는데묘한 흥분 때문에 8시가 좀 넘어서 눈을 떴다눈을 뜨자마자 통장 잔액이 60만 원이라는 것이 떠올랐다낮에는 핸드폰을 만지고 있다가는 당황스러운 독촉 전화를 실수로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황급히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결제 문자와 강의 안내 문자도 확인했다강의 안내 문자는 차차 보기로 하고통장 잔액을 확인했는데온라인 포인트 2만 몇천 원 남은 것을 결제할 때 사용하고쿠폰도 적용하고 해서덜렁 62만 원일 줄 알았던 통장 잔액이 65만 9344원이 남아있었다우습게도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그 책 쓰기 강의가 나를 위해운명적으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처치 곤란이던 온라인 포인트도 한 번에 썼고쿠폰까지 적용되어서 예상한 가격보다 한참 저렴했다결제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혹시 포인트와 쿠폰을 사용한 것 때문에 환불 하고 싶어도 환불이 안되는 것은 아닐까 잠시 걱정이 들었다만약 전화로 환불 요청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전화도 자유롭게 쓸 수 없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좋은 식당에 다녀온 셈 치고그냥 환불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시계를 보니 9시 20분이 넘어가고 있어서황급히 핸드폰을 껐다낮 동안 핸드폰이 켜져 있으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그래서 낮 동안에는 핸드폰을 꺼둔다채권 추심 전화 시간을 제한하는 법을 누가 만든 지는 모르겠지만진심으로 여러 사람을 구한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인지 몸에 묘한 긴장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서졸리지도배고프지도 않았다언제 팔까 시기를 고민하고 있던노트북을 펼쳐서어젯밤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길고 진지한 강의 일정과 커리큘럼강사 소개 등 끝없는 설명을 읽어보기로 했다

노트북은 팔지 말아야겠다.’ 


충동적으로 결제한 것 치고는 강의 내용이 좋은 것 같았고설명도 꼼꼼하고 진지했다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책을 내는 과정은 전자책이 아니고종이책을 출간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전자책을 누구나 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종이책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순간 종이책을 낸다는 것을 구실삼아 돈을 내야 한다고 할까 걱정이 됐지만어떤 추가 요금이 들어도 낼 돈이 없고전자책은 누구나 낼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전자책으로 내면 될 것이다어쩌면 진짜로 추가비용 없이 종이책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렇게 생각하면 쿠폰을 적용해서 20만 원도 안 되게 결제한 이 강의는 비싼 호텔보다고급 식당보다는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 02화 돈계산을 멈춰야 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