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능력이 쓸데없는 이유는 볼륨 때문이었다.
‘마음의 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작게 들린다. 그래서 대화를 하고 있는 순간이나, 여러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 보통 단둘이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하는 생각이 주로 선명하게 들린다. ‘마음의 소리’도 역시나 소리의 일종이기 때문에 거리가 멀어지면 잘 들리지 않는데, 그래서 한두 마디의 짧은 생각 정도만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별 중요한 것들도 아니었다. ‘빨리 화장실 가야지’, ‘커피 다 식었겠네’ 같은 것들이고, 가끔은 나에 대한 평가도 있었다.
‘말귀 더럽게 못 알아듣네’, ‘답답한 사람이네’ 같은 것도 있고,
‘괜찮은 사람 같은데?’ 같은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크게 대단한 평가도 아니고, 엄청난 진심이 담긴 것들도 아니어서 보통은 그냥 흘려듣는다.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리면서,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내더라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낀다. 아무리 대단치 않은 생각이라도, 그것을 누군가 엿듣는다는 사실이 꺼림칙한 것은, 듣는 사람이나 들키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어릴 때는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엄마도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항상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누구에게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른이 되면서 가족처럼 가까워진 친구나 연인에게 사실은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진지하게 고백하기도 했었다.
이 능력에 대해 처음 알게 되면, 누구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농담이나 속임수가 아니냐고 되묻다가, 진지한 모습에 몇 번의 테스트를 요구하고, 능력이 진실임을 마침내 확인하게 되면, 이내 흥분하여 수많은 질문을 쏟아 놓는다. 수많은 궁금증을 풀어주고 나서야,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은 가능하지만,
‘별 쓸모도 없고, 소리까지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내가 생각을 읽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잘 들리지도 않는다니까’라고 해명할 수 있었다.
‘화장실 다녀올게’ 같은 쓸데없는 말을 실제로 듣기 몇 초 전에 미리 이해하는 것과 같다면서 안심시킨다.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내 능력은 별것 아니라고 설명할 기회를 매번 이렇게 힘들게 얻었다.
인생에서 가장 신뢰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었기에 나를 이해하고 인연을 이어가려고 노력해주었다. 그러나 결국 은밀한 생각의 일부라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점점 불쾌해지거나, 며칠 지난 뒤에 도돌이표처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어떤 속임수를 썼느냐며 추궁하기도 했다.
상대가 찜찜한 기분을 덮어두고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는 매우 신기해하면서, 마음을 완벽히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잠시 기뻐하기도 했다. 한동안은 누군가에게 비밀은 털어놓아서 비로소 홀가분한 기분도 느꼈다. 비밀을 공유하게 된 우리들은 친구나 연인 간의 사소한 놀이도 즐겼는데, 말하지 않고도 원하는 음식을 주문해준다던가, 할 말을 대신해준다던가 하면서, 한동안 잘 지내기도 했다. 그때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은 기분 덕분에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은 생각조차 맘대로 할 수 없는 족쇄 같은 것이다. 숨겨둔 추악한 면, 못된 장난, 입 밖으로는 절대 내뱉지 않을 잔인한 말, 본인조차 의도하지 않은 음란한 생각 같은 것을 들킬까 봐 언제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나와 함께 있으면 나쁜 생각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나쁜 생각만 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만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면서, 모두가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는 것은 당연했다.
‘나 어디 바뀐 것 같지 않아?’
‘꼭 말로 해야 알아?’ 같은 말이 나에게는 필요 없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머리 잘랐구나’ ‘말하지 않아도 네 맘 다 알아’
이렇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인데, 왜 모두 떠나는 것일까?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던 이해는 똑바로 알아주는 것이 아니고 그저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의 시도 후에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