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머리 오목눈이
내가 당신 곁에 처음 멈춰 섰던 것은 지난 초봄이었어요.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끙끙대던 때였지요. 끝맺지 못한 꿈이 끈적거리며 들러붙길래 이른 아침에 밖으로 나섰어요. 연둣빛 어린 생명체들의 사이를 한참 달렸지요. 한 곳에 멈추어 섰어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거기가 좋다고, 앞으로 자주 오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멍하니 앉아 있는 장소. 나는 그곳을 '멍소'라고 불렀어요.
햇살이 점차 뜨거워지면서 당신을 알아보았습니다. 당신은 허리를 깊게 구부린 커다란 버드나무라서 땅에 닿을 듯한 부드러운 가지들이 커튼처럼 빛을 가려 주었어요. 당신의 가지 위로 어느 날에는 오목눈이들이, 또 어느 날에는 박새들이 오르락내리락 분주했어요. 당신 우듬지에 홀로 오뚝 앉아 있는 까치를 봤어요. 세상을 다 얻은 듯 당당한 게 우스웠지만, 당신은 조용히 그 우쭐거림을 받쳐 주었습니다. 나는 그 시끌하고도 고요한 그늘 아래에서 뜨거운 여름 아침들을 보냈습니다.
나는 서서히 나아졌어요. 상실감과 자책감은 매일 조금씩 옅어졌어요. 깊은 산속에서 경험한다는 치유를 당신 그늘 아래에서 얻은 셈입니다. 너무 좋아서 그랬을까요? 괜히 당신과 헤어질 순간을 상상해 보았어요. 물론 떠나는 쪽은 나였지요. 그 반대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생각만으로도 그리움에 사로잡혀 고개를 젓다가 당신을 바라보며 안도하곤 했답니다.
어마어마한 폭설이었습니다. 물을 머금은 무거운 눈이라고 했습니다. 산책길이 모두 막혀 며칠이 지나서야 멍소에 갈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빼 들고 올려보아야 했던 키 큰 나무들의 당당했던 정수리가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어요. 마침내 도착한 멍소는 온통 하얀 눈밭이었고 그 위에 누군가 까맣게 넘어져 있었지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요. 당신은 늘 우리를 넉넉하게 덮어주었던 단단한 존재였잖아요.
당신의 가지들은 머리카락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생애 처음 바닥에 누웠을 당신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나무에게 그것이 휴식이었을 리는 없었겠지요. 그제야 당신이 몇 해를 살아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 건 차라리 다행이었어요. 나는 당신의 쓰러진 몸통이 드리운 작은 그늘 아래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단단한 피부가 날카롭게 찢어진 자리에 순한 속살이 드러나 있었어요. 아직 촉촉했던 그 자리에 손가락을 대고 반복했던 내 작별 인사를 들었나요.
부디 기억해 주세요. 당신을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었던 오목눈이들, 박새들, 까치들 모두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요. 당신의 그늘 아래 오래 멍하니 앉았던 한 인간이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요. 나는 거기서 작은 좋음에 집중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었지요. 당신은 그중에서도 가장 성실한 기쁨이었습니다.
그루터기로 남은 당신을 봅니다.
감사했습니다.
#내 손가락 위의 새
#토요 그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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