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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Jan 05. 2025

4장, 물려받은 절망 (1)

아, 옛날이여

 1996년 4월, 서울 올림픽대교에서 최 씨가 자살했다. 나이는 서른 여덟이었다. 최 씨는 천만 원 정도를 빚진 상태였다. 아내가 오랜 시간 백혈병으로 고생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죽고 빚이 남았지만, 최 씨는 두 자녀를 잘 키우는 데에 전념했다. 아들이 중학교에서 체육특기자로 선발되자, 최 씨는 아들을 위해 매달 120만 원에 달하는 교육비를 감당했다. 딸의 피아노 과외비로도 7만 원 정도를 썼다. 이 때 최 씨의 소득은 한 달에 150만 원 정도였다. 1996년 1인 가구 최저 생계비가 23만 원 정도였으니,1) 세 사람 생활비에 빚까지 감당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한계에 몰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내가 벌어서 걔들 뒷바라지야 못 하겠어요 그러면서 한번 시켜보겠다고 그러더라고..."

- 최 씨의 형2)


 지금 청년의 부모세대라면 대부분 9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을 것이다. 흔히 90년대를 낭만의 시대라고 부른다. 당시 사람들은 세상이 나아지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우선 경제가 매년 10%씩 성장했다. 그 덕에 새로운 일자리가 구직자보다 2배 많았다.3) 노동력 수요가 공급보다 많으니, 그 가격인 임금은 경제성장률보다 가파르게 상승했다.4) 특히 노태우 대통령 시대에 실질임금이 58% 이상 성장했다.5) 외환위기 이후로 우리나라는 여태 90년대 호황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집값도 지금보다 안정적이었다. 1990년 1월 서울 아파트 가격은 2022년 1월의 5분의 1 수준이었다.6) 이 때 정규직으로 취업해서 수도권에서 집을 사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이 지금도 고소득층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 씨 사건이 보여주듯,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가 짙었다. 88년부터 97년 사이에 정규직은 매년 평균 3.3%씩 늘어났는데 임시직은 4.8%씩 늘어났다. 가파르게 오르는 임금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업이 하청에 외주를 맡기는 식으로 정규직 고용을 기피한 것으로 보인다.7) 주로 늘어난 일자리도 높은 학력을 요구하지 않는 생산직이었다.8) 그런 일자리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거나 경제위기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흔들리기 마련이다. 지금 중년, 노년 빈곤율이 높은 데에는 90년대부터 망가진 노동시장 탓이 크지 않을까.


 실제로 1990년대 초반부터 불평등과 빈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연구가 있다.9) 1980년대부터 우리나라 정부는 서서히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내려놓다가,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장에 통제력을 넘기기 시작했다.10)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강력한 정부가 여러 기업들을 육성하고 통제하며 경제 전반을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소수 대기업이 정부에 협력한 대가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경제력의 차이가 뚜렷한데 통제만 사라졌으니, 자연히 약육강식이 시작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불평등과 빈곤이었다.


 노동시장이 망가진 만큼, 생존 경쟁도 과열되었다. 그 치열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 교육비였다. 1992년 한국사회학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수험생 부모 63%는 과외 비용을 부담스러워 했고, 30%는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교육비를 지출했다.11) 어떤 집은 생활비의 3분의 1을 교육비로 지출했다.12)


 1994년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사교육비가 국방비보다 2배 가까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지적도 나왔다.13) 실제로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90년에는 사교육비가 전체 소비에서 3%를 차지했는데, 1997년에는 5.3%까지 잡어먹었다.14) 물론 실제 비중은 정부 통계보다 더 클 것이다. 정부 통계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 학생까지 포함해서 평균을 낸 결과이기 때문이다.15)


 무사히 대학에 들어가고 취업에 성공해도 삶이 편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90년대는 지금보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1991년에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대학생 38.8%는 신고식에서 선배가 후배를 구타해도 된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 24.4%는 선배의 구타를 아예 폭력으로 여기지도 않았다.16)


 이렇게 폭력에 둔감했던 탓인지, 2018년에 타살된 2, 30대는 68명에 불과한데, 1998년에 타살된 2, 30대는 그 6배가 넘는 436명에 달한다.17) 이외에도 주변 사람들 이야기나 사건 기사를 참고해 보면, 90년대에는 온갖 폭력이 정부 통계나 사회적 감시망에 잡히지 않고 만연했던 것 같다.


 실제로 큰 사건이 있었다. 1996년 3월, 충남대학교 근처 식당에서 한 신입생이 사망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너무 많은 술을 마신 탓이었다. 90년대에는 학교 선배가 신입생에게 술을 강요하는 '사발식'이 있었다. 사발식은 원시적인 통과의례였다. 신입생은 선배가 사발에 따라주는 술을 다 마셔서 학교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갓 성인이 된 사람이 갑자기 술을 들이붓는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리 없었다. 1998년 2월, 그 학교 선배는 음주치사로 기소당했고 유죄선고를 받았다. 사발식은 전부터 있었지만, 음주치사로 기소된 것은 이 사건이 최초다.18)


 이처럼 90년대는 그닥 낭만적이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겪는 사회문제는 대체로 90년대부터 몸집을 불렸다. 90년대는 위험했다. 그리고 그 위험에 각자 알아서 대응해야 했다. 돈 없고 인맥 없는 다수는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90년대 청년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보여주는 정부 통계는 많지 않지만, 그 사실 자체가 당시 청년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부가 사회문제에 개입하려면 실태부터 확인해야 하는데, 통계가 없다는 말은 실태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재정 규모가 90년대보다 3배나 커진 지금에서야 정부가 고독사 문제의 실태를 겨우 파악했는데,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90년대 청년은 물러서지 않았다. 90년대 청년은 가혹한 사회생활을 견디면서 악착 같이 살아 남았다. 아파도 일을 쉬지 않았고, 부당한 대우도 어지간하면 다 참았다. 주 5일제도 없이 가혹한 근무시간을 견디면서도 사회생활을 빼먹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힘든 와중에도 자녀가 결혼할 때를 대비해서 온갖 경조사를 챙겼고, 명절에는 네비게이션도 없이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90년대 청년은 정말 이 악물고 내달리면서 지금 청년을 길렀다. 아마 성실함으로는 어느 나라, 어느 세대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맹목적인 성실함이 지금 청년을 자살로 몰아가는 원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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