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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Dec 23. 2024

3장, 햄릿이 살아야 했던 이유 (6)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뇌출혈로 쓰러진 아빠를 병원에 두고 집에 돌아온 날, 나는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다. 싸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상황을 모르는 친구들은 같이 놀자고 여러 번 전화했다. 그런데 나는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밖에서 놀려면 용돈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애초에 밖으로 나가서 웃고 떠들 기에는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다들 우울해 하는데 나 혼자 나가서 놀아도 괜찮을지 등, 온갖 생각이 머리를 무겁게 했다.


 곧 마음 속 소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시끄러워졌다. 나는 그저 이불 속에 숨어들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친구들이 돌아가며 나에게 전화했다. 나는 시끄러운 아침 알람을 끄듯이 스마트폰을 다물게 했다. 그래도 부재중 연락이 계속 쌓였다. 나는 아예 친구들 연락처를 모조리 차단해 버렸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거친 숨소리에 집중했다. 분명 친구들에게 차분하게 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그 생각을 떠올린 것은 며칠 동안 이불 속에서만 뒹굴고 난 다음이었다.


 그 뒤로 한두 달 동안 심부름할 때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다. 종종 친구들이 생각났지만, 먼저 차단해 놓고 다시 연락할 용기는 없었다. 처음에는 혼자가 되어도 괜찮을 줄 알았다. 오히려 혼자 잘 지내야 성숙한 것이라고 믿었다. 이마와 명치는 계속 무거웠지만, 고민을 기록하고 숨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원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잘 굳었지만 문제가 더 심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편의점에서 계산하고 나올 때 '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자연스럽게 꺼내지 못하게 되었다. 말을 더듬거나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버릇도 생겼다. 오래 앉아서 일하는 사람이 엉덩이 근육에 힘 주는 법을 잊는 것처럼, 나는 몇 주만에 대화하는 방법, 사람과 어울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그런 내 모습을 편하게 받아들일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도 않았다. 관계가 사라질수록, 나는 망가졌다.


 그 때나 지금이나 고독을 찬양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의 조언은 한결 같다. 혼자가 되어도 괜찮으니, 관계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자기계발서 작가는 니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를 앞세워서 스스로 고독해지라고 가르친다. 심지어 외로움의 원인으로 정신적인 미성숙이나 자기애 부족을 지목하는 책도 있다. 이런 값싼 자기계발서의 유행이 보여주듯, 적지 않은 사람이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며 인간 관계를 가볍게 여긴다.


 물론 고독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사회관계는 돈과 시간, 주의력 등 많은 자원이 필요한 일이다. 매일 친구들과 놀러 다닌다면 저축과 공부는 불가능할 것이다. 내향인이거나 예민한 사람이라면 정신적으로 지쳐 버릴지도 모른다. 너무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단식하면 소화기관을 쉬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때로 관계에서 조금 멀어지면 좋은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도 적절한 고독이 좋은 삶에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49)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고독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게임 티어를 올리기 위해 하루이틀 밤을 새기로 선택한 것과 야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주일 넘게 잠을 못 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마찬가지로 휴식을 위해 잠시 연락을 받지 않는 것과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흔히 타인은 지옥이라며 비아냥거리지만 사람은 타인 없이 살 수 없다.


 하버드 대학교는 무려 1938년부터 누가 무엇 때문에 좋은 삶을 사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명 '하버드 성인 발달 연구'는 80년 동안 3세대에 걸쳐 천명 넘는 사람의 삶과 생각을 추적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요소는 다양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일관되게 좋은 삶에 기여하는 것으로 증명된 요소는 단 하나였다. 바로 '좋은 관계'다.50) 연구에 따르면, 서로 지지하고 돌봐주는 관계는 누가 행복한지 예측할 때 가장 결정적인 요소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과 성장 조건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좋은 관계가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하다.


 우리에게는 의지력 연구자로 알려진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 역시 좋은 관계를 강조했다. 바우마이스터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소속감 욕구(Need to belong)'를 타고난다.51) 소속감(belongingness)은 수분과 수면처럼 근본적인 필요다. 어떤 사람도 목마름과 졸림을 없앨 수 없는 것처럼, 모두가 선택의 여지 없이 소속감을 원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바우마이스터가 말한 소속감(belongingness)은 우리말 소속감과 의미가 다르다. 우리말로 소속감은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그 일원으로 인정받는 느낌을 주로 가리킨다. 그런데 바우마이스터가 말한 'belongingness'는 소수의 친밀한 사람과 오랜 시간 안정적으로 사랑과 보살핌을 주고 받을 때 느끼는 애착감을 의미한다.52) 예를 들어, 동아리나 팬클럽에 가입해서 회원들과 함께 행동하면 우리말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면 바우마이스터가 말한 소속감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소속감이 근본적인 욕구라는 말은 박탈되었을 때 심각한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수분 박탈이 잔인한 고문인 것처럼, 소속감 박탈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위협이다. 오랜 시간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이 심할 경우 환각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괴로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의지력과 추론 능력을 잃고 정신질환에 취약해 진다.53) 사람은 타인과 서로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더 허약하고 무능해지는 것이다. 그 사실을 날 때부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애착 관계를 찾으려 한다. 비행청소년들이 '가출팸'을 만드는 것도 가족을 대체할 애착 대상을 만들기 위해서다.54) 


 여기서 끝이 아니다. 토마스 조이너에 따르면, 소속감 좌절은 인식된 짐스러움과 함께 사람을 자살로 떠미는 강력한 압력이다.55) 만약 자신이 주변에 짐이 된다고 느끼는 와중에 소속감과 단절된다면, 사람은 억제하기 힘든 자살 생각에 빠진다. 고통 앞에서 혼자가 된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가 없는 어머니는 자녀가 많은 어머니보다 자살할 가능성이 크고56), 사회적으로 고립된 청년은 그렇지 않은 청년보다 자살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더 크다.57) 2022년 정부 조사에 따르면, 고독사한 청년의 절반도 자살해서 죽은 것으로 드러났다.58)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한 사람 역시 자살 위험군이다.59)


 바우마이스터는 사람이 결국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일한다고 이야기했다.60) 사람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데는 각자만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 밑에는 결국 애착을 느끼는 상대와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기저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핀란드 철학자 겸 심리학자 프랑크 마르텔라도 삶의 의미에 대해 다룬 책에서 '관계 맺기'를 의미의 원천 중 하나로 지목했다.61)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때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곧 사랑을 주고받는 대상이 없을 때 동기도 의미도 잃는다는 뜻일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바란다. 그 외 선택지는 없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살했다면 그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기댈 수 있는 타인이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송파 세 모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혼자 남겨지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그 공포에 온 신경이 집중되면 사람은 생존 욕구조차 잠시 잊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자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많지 않다. 자살은 파도에 휩쓸리는 것과 같고, 소속감 좌절은 혼자 거스르기가 매우 어려운 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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