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햄릿이 살아야 했던 이유 (4)
나도 모르게 자살을 연습하다
다이어트를 하기로 마음먹은 날부터 3일 동안, 나는 근육통 탓에 드러누웠다. 일단 운동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첫날부터 강변으로 나가서 한계까지 달렸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허벅지와 복부에 굉장한 통증이 느껴져서 거의 기어다녀야 했다. 그래도 통증이 가벼워지면 다시 나가서 달렸다. 한 번 데인 뒤부터는 적당한 속력으로 적당한 거리를 달렸다. 근육통을 느끼고, 쉬고, 다시 근육통을 느끼는 일을 몇 주 반복하다 보니, 확실히 달리기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아마 나보다 더 격하게 운동하는 사람들도 한 번 씩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고통을 반복해서 겪다보면 사람은 고통에 익숙해진다. 근육통 뿐만 아니라 불안이나 두려움 같은 정신적인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거미나 엘리베이터 등 무언가에 대한 공포증을 치료할 때, 심리치료사는 환자가 공포의 대상을 반복해서 접할 수 있게 돕는다. 처음부터 실제 거미를 팔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거미 그림에 익숙해지면 서서히 실제 거미를 만질 수 있도록 단계를 조절하기도 한다. 이런 치료법을 노출치료라고 부른다. 그 핵심 원리는 반복 노출을 통해 대상이 안전하다는 것을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22) 고통이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사람은 고통에 적응한다.
같은 원리로, 사람은 자신을 공격할 때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에도 어느정도 익숙해질 수 있다. 토머스 조이너에 따르면, 사람은 여러 번 자해를 시도하다가 결국 자살을 시도할 능력도 얻는다.23) 처음에는 전혀 상처를 입히지 못하더라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을 조금씩 연습하다 보면 결국 자신을 치명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자해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자살하기 위해서든 통증으로 정신적 고통을 잊기 위해서든, 모든 자해는 자살 연습이다.
그래서 자해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24) 자살할 의도가 없는 '비자살' 자해여도 마찬가지다. 의도와 상관 없이, 자해 경험은 누가 자살을 시도할지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25) 마찬가지로 과거에 자살을 시도해 본 사람은 2 ~ 4년 안에 한 번 더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26) 운동을 반복하면 근육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여러 번 입히다 보면 자신을 더 능숙하게 공격할 수 있게 된다.
자해 행위 뿐만이 아니다. 신체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무엇이든 자살 연습을 돕는다. 타인이 나를 공격하든 내가 나를 공격하든, 고통과 두려움에 여러 번 노출된다는 점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폭행당해 본 사람, 정기적으로 문신을 새겨 본 사람, 부상당할 위험이 큰 직업을 가진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살할 능력을 키우게 된다.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도 그렇다. 반복 노출을 통해 고통에 둔감해지고 두려움 앞에 대담해지면, 사람은 자신을 해칠 능력을 얻는다.27)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공무원의 자살률이다. 2012년에서 2016년 사이 일반행정 공무원의 자살률은 10만 명 당 8.4명이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동안 경찰관의 자살률은 18.4명으로 2배 이상 높았다.28) 자주 과로하고 위험한 사건에 투입되는 만큼, 많은 경찰관이 의도치 않게 고통과 두려움에 익숙해지며 자살 능력을 얻었을 것이다.
소방관 중에서도 순직자보다 자살자가 더 많다. 2010년부터 2019년 사이에 순직을 인정받은 소방관은 54명인데 같은 기간 동안 자살한 소방관은 무려 90명이다. 우리나라가 순직에 까다롭다는 점을 감안해야곘지만, 그래도 소방관의 자살률은 경찰관보다 높은 편이다.29) 경찰관과 소방관처럼 온갖 위험에 몸을 던지는 사람은 의도와 상관 없이 자살에 한 발자국 더 접근하는 셈이다.
정신적인 고통을 자주 겪는 사람도 위험하다. 예를 들어 거식증을 겪은 사람은 치명적인 자해를 시도할 수 가능성이 있는데, 이미 기본 욕구와 다투는 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30) 배고픔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지만, 거식증 환자는 날씬한 신체에 대한 강박 등 여러 이유 때문에 배고픔을 무리해서 견딘다. 그러면서 점점 고통에 둔감해진다. 무리한 절식은 자해나 다름 없는 셈이다.
PTSD도 물론 위험하다. 우리나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탓에 PTSD를 겪어 봤을 경우, 남들보다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31) 또한 자살률이 높은 경찰관의 경우, 10명 중 7명이 PTSD를 겪어 본 것으로 조사되었다.32) 아무래도 경찰관은 피해자나 동료의 죽음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자주 겪을 수 밖에 없고, 이런 심리적인 고통이 과로와 함께 경찰관의 치명적인 자해 능력을 키우는 듯하다.
어느날 갑자기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평소에 잘 웃는 사람이 뜬금 없이 자살했다면, 사실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 고통받았을 것이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여러 번 고통받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치명적으로 자해하는 법을 익힌다.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러 번 폭행당하거나, 정신질환을 겪거나,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다 보면, 자해할 때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에 조금씩 익숙해진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을 치명적으로 공격할 능력을 얻게 된다. 이런 자해 능력이 자살의 대전제다.33) 고통에 둔감해질수록, 그리고 두려움에 익숙해질수록, 사람은 자살에 가까워진다.
모든 자살은 긴 가시밭길을 걸었다는 증거다. 물론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이 모두 자살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자살은 극도로 두려운 일이고, 그래서 대다수는 크게 고통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자살을 대안으로 여기지 않는다.34) '할 수 있다'와 '하고 싶다'는 다른 문제다. 자주 고통받으면서 자살 능력을 얻었다고 하라도, 심각하게 자살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은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강렬하게 자살하고 싶어질까. 토머스 조이너는 두 가지 문제를 자살 생각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한다. 두 문제가 동시에 일어났고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길 때, 심각한 자살 생각이 떠오른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이 주변에 짐이 된다는 느낌, 한국자살예방협회의 번역으로는 '인식된 짐스러움(perceived burdensomeness)'이다.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