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햄릿이 살아야 했던 이유 (3)
마음의 눈이 어두워질 때
어두운 밤, 한 운전자가 신호를 지키며 도로를 달렸다. 속도는 조금 빨랐다. 그런데 검은 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횡단보도 밖에서 차도로 뛰어들었다. 운전자는 뒤늦게 아이를 발견했고 결국 아이를 치고 말았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럴 경우, 운전자가 아이를 죽였다고 할 수 있을까. 차를 몰아 본 사람이든 아니든, 대다수는 제한된 시야를 감안해서 운전자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능력 밖에 있는 일을 두고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같은 상황에서 대다수는 아이를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아이가 튀어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법원도 운전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10)
이처럼 물리적인 시야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에는 다들 금방 납득한다. 하지만 심리적인 시야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에는 냉랭하기만 하다.
우리는 주의력을 통해 세상을 본다. 주의는 넘쳐나는 정보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선별해서 받아들인다.11) 주의는 마음 속 시야이고, 마음 속 시야가 어떤가에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예를 들어 한 곳에 깊게 주의를 쏟으면 통증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주의가 통증이라는 정보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12)
상황에 따라서, 마음 속 시야는 주변을 전혀 살피지 못할 정도로 좁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강도가 피해자를 칼로 위협했을 때, 피해자는 칼만 기억하고 강도의 옷차림이나 외모를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눈 앞의 위험물에만 주의를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13) 이런 '무기 집중' 현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음 속 시야는 마치 깔대기를 쓴 것처럼 좁은 구멍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이렇게 주의가 좁아지는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터널 시야'라고 부른다.
터널 시야에 갇힌 사람은 문제해결 능력을 잃는다. 시험장에서 잔뜩 긴장하면 쉬운 문제도 풀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 속 시야가 좁아진 사람은 차분하게 다양한 대안을 검토하는 능력을 잃는다. 자연히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보다 극단적으로 판단하게 된다.14) 다른 대안을 떠올릴 수 없으니 모 아니면 도, 완벽 아니면 실패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파멸로 향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터널 시야에 갇힌 사람은 당장 보이는 것, 당장 떠오른 것에만 주의를 쏟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벗어나서 더 넓은 관점으로 문제를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거법으로 문제 해법을 찾게 된다.15) 새로운 해법을 찾지 못하고, 지금 당장 내가 쓸 수 없는 해법을 하나씩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 하나 대안을 지우다가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고 스스로 고통에서 빠져나갈 방법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의 마음 속 시야에는 최종 해법만 보이게 된다.
실제로 미국 심리학자이자 자살연구의 선구자인 에드윈 슈나이드먼은 자살을 유일한 대책처럼 여겼다는 진술을 여러 자살시도자들로부터 들었다. 그래서 슈나이드먼은 '이 방법 밖에 없다'는 왜곡된 생각이 자살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며, 심리치료사가 이 부분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진단했다.16) 후배 심리학자들 역시 터널 시야가 자살 생각에 빠진 사람들의 공통점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발견했다.17)
마음 속에서 여러 선택지가 사라진 상황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마치 온몸에 불이 붙은 사람이 폭포든 깊은 강이든 상관 없이 눈 앞에 보이는 물로 뛰어드는 것처럼, 터널 시야에 갇힌 사람은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이는 곳으로 성급하게 달려들 수 있다. 그 탈출구가 자살일 때, 사람은 생존 욕구라는 강을 두 팔로 거스른다. 자살은 마음의 오작동이 일으킨 급발진 사고에 가까운 셈이다. 자살 밖에 안 보일 정도로 마음 속 시야가 좁아졌을 때, 그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생에서 정말 힘든 상황을 맞았을 때 이것을 혼자 극복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혼자서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거나 혹은 그가 처한 상황이 진정 힘든 상황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 고 임세원 교수18)
물론 터널 시야만으로 모든 자살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사람이 본능을 거스르는 일인 만큼, 자살에는 굉장히 다양한 원인이 개입한다. 심리학자들은 터널 시야 외에도 사람을 자살로 몰아가는 여러 조건을 발견했다. 그 조건을 밝힌 이론 중에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미국 심리학자 토머스 조이너가 제안한 '대인관계이론'이다.
대인관계이론은 이름처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살의 핵심 원인이라고 보는 이론이다.19) 대인관계이론은 나라 안팎에서 자살을 예측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자살예방협회가 2023년에 발간한 책인 '자살예방의 모든 것'에도 소개되어 있고, 국내외 여러 심리학자의 검증도 거쳤다.20)
그런 대인관계이론에서는 사람을 자살로 내모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자신을 해칠 능력을 얻는 것이고, 둘은 주변에 짐이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셋은 타인과 깊게 교류하거나 사랑과 보살핌을 주고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갖춰질 때,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을 시도한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