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상담가 선생님은 AT(Adult)는 상당히 높이 올라 있는 것에 비해서, NC(Nursing Child) 지수가 거의 바닥인 남편과 나를 번갈아 살펴보셨다. 얼굴로 드러나는 표정은 애써 숨겼지만 걱정의 눈빛은 감출 방법은 찾지 못하신 것 같았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부재를 겪었다. 우리는 경제적인 이유로 타인에게 맡겨졌는데, 남편은 당시의 일들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기억이 또렷했다. 난감하고 불안했던 기억들... 그중 유독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었다.
내 앞에 두 여자분이 앉아 계시는데, 한 여인은 행색이 초라했고 다른 한 여인은 깨끗한 옷에 얼굴이 참 예뻤다. 그들이 내게 물었다.
"누가 엄마야?"
엄마라는 단어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잠시 주저하다가 늘 나를 안고 계셨던 분의 익숙한 냄새에 끌려 한 여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다른 여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가리키지 않은 그 예쁜 여인이 나의 엄마였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왜인지 미안함을 느꼈다. 기억 속의 장면이 과연 사실인지 중학생이 되던 해에 어머니에게 물었었다. 어머니는 무척 놀라셨고 이내 쓸쓸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네가 돌도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네?"
돌사진을 찍으러 간 사진관에서 건넨 조바위가 내게 맞지 않았다. 카메라 앞 의자에 앉았는데 내려다보니 한쪽 양말에 구멍이 나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손으로 구멍이 난 부분을 잡아당겨 엄지발가락으로 눌렀다. 바닥을 누르고 있는 한쪽 발가락, 머리 위로 올려놓은 모자, 난처한 표정이 사진에 그대로 담겼다. 두 돌이 넘어서 찍은 돌사진이었다.
어머니는 직장에 다니지 않으셨음에도 한 번도 학교 운동회에 오시지 않았다. 엄마들이 돗자리와 도시락을 챙겨 와서 자녀들과 함께 흩어져서 먹는 시간이 되면 나는 조금의 돈을 손에 쥐고 주변 상가를 서성였다. 사 먹을 수 없는 날은 먹지 못했다. 진지하게 내가 부모님의 친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자녀들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하셨다.
"너희를 희생시켰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미안하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노력하기 시작하셨다. 처음으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치킨도 시켜 먹었다. 멀리 여행도 갔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과 부모님이 나를 위해서도 계셔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자주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달려가다가도 멈춰 서게 만드는 둔하지만 간지러운 흉터였다. 어린 시절을 함께 공감하며 지내지 못했던 그 시간을 통해 어머니와 나는 분명 서로에게 거리감과 거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거나 여린 존재를 돌보는 일을 잘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일적인 관계는 비교적 잘 해낼 수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시간과 감정을 내어주는 일은 우리에게 참 어려웠다. 선교사 허입 절차로 받게 된 그 심리 상담은, 어른인 우리 안에 어린 시절이 형성해 놓은 단단한 것들과 힘겹게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강퍅한 부부에게 첫 아이가 찾아왔다.
세상의 모든 아기들과 마찬가지로 순결하고 귀한 아이였다.
꿈속에서 나는 새하얀 눈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 오두막에 이르러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발견하자, 그 다이아몬드가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임신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예정되었던 출국 일정을 잠시 미루고 임신 초기가 지나기까지 태중의 아기를 잘 돌보기로 했다. 태명은 '이삭'이라고 지었다.
9주 차, 초음파를 보시던 선생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기집 안에 아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계류 유산이니 최대한 빨리 소파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지인들 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떻게 알고는 다가와서 아이를 위한 축복의 말을 건넬 만큼 호의를 많이 받은 아이였다. 이 아이가 살아갈 삶에 대한 기대가 날로 커져갔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니... 수술을 받지 않겠다며 일어서는 나를 향해 선생님은, “진행이 시작되면 많이 아플 거예요.”라며 쓴소리를 하셨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다른 병원으로 가서 재검을 받아볼 용기를 내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소망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허무하게 아기의 삶이 멈추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조금 더 잘 먹고, 커피도 끊고, 일도 좀 줄이면 내 안에서 아기가 보란 듯이 건강하게 자라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주를 더 버텼다. 돌아보면 정말이지 무모하고 어리석은 산모였다.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날, 하복부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하혈을 하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하혈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서 정신을 거의 잃고 병원에 도착하자 쇼크가 왔다. 부들부들 떠는 내 몸속에서 응급의가 무언가를 꺼냈다. 그 순간 나는 부여잡고 있던 소망을 놓쳐버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그대로 수술실로 올려 보내졌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입원을 위한 짐을 챙기던 남편은 바닥에서 아기와 내가 쏟아낸 피를 닦아내며 주저앉아 울었다고 한다. 사는 내내 좀처럼 흘러나오지 않던 우리의 눈물이 이 여린 자녀의 삶과 죽음 앞에서 속절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 아기는 왜 이리도 허무하게 가야만 했을까? 형태도 알아볼 수 없는 핏덩이였던 이 아이를 향한 축복과 언약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 버렸을까? 나의 마음이 슬픔과 분노를 날카롭게 오가다 그만 신의 마음을 향해 겨눠졌다. 서늘하게 그어댄 말의 끝은 이것이었다.
"당신은 유산을 경험한 적이 없으세요. 제 고통을 안다고 하지 마세요!"
다음 순간. 무거운 침묵이 나를 짓누르고 내 영혼이 아득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분은 단 한 음절도 소리 내지 않으셨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아득히 깊고 깊은 슬픔이었다. 그것은 내가 영원히 넘어서지 못할 무거운 감정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분은 나의 모든 고통을 완전하게 공감하고 계셨다. 한참을 지나 미세한 음성이 내 영혼에 들려왔다.
"딸아, 나 역시 수없이 잃었다. 내가 너를... 안다."
태중에 잠시 머물다 떠나간 이삭이를 통해 느꼈던 감정들... 사실 그것은 오랫동안 내 안에서 정지된, 허용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뒤이어 나타난 분노와 원망 또한 내 안에서 처음으로 드러내는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애도의 시간 동안 나는 그 낯선 감정에 저항하지 않고 한동안 그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감정들의 끝길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완전한 공감을 받게 되었던 그 경험은 내 영혼에 깊은 안정감이 되어 내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들을 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내 앞에 움직이는 모든 사람들이 '자녀'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 자녀가 아닌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구나. 우리는 모두 자녀구나... 우리 모두가 이리도 귀하구나... 그리고 누군가의 태 안에서 핏덩이였던 나도 그렇게 귀하고 귀한 존재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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