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창이로 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고귀하게 여겨져야 했던 삶의 시작점이 있었다.
엄마의 태중에서부터 거절감을 느끼며 자라난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생명과 마음을 존귀히 여기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자해가 반복되던 중, 원인으로 발견된 것이 태내 기억이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끔씩 듣곤 한다.
산모의 마음 가짐 하나가 이토록 치명적이니, 하물며 자녀가 태어나 자라면서 부모에게 보고 듣는 것은 오죽할까? 과연, 육아는 시작부터 끝까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니 차라리 낳지 않겠다는 다짐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들린다.
"저는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고, 아이와 함께하는 나를 행복하게 여길 자신도 없어요."
"만일 결혼하면 저는 바로 묶을 거예요. 이 빌어먹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딩크족이에요. 지금은 이혼을 준비하고 있고요. 아이를 갖지 않길 잘했죠 뭐."
"결혼 후에 2년 동안은 피임을 하면서 신혼을 누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뒤로도 아이가 생기지 않더라고요. 저는 마음만 먹으면 생기는 것이 아기인 줄 알았어요."
세 자녀를 키우며 철없이 웃고 다니는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들로 여겨지는 벅찬 조건들, 자녀를 낳는 순간 시작될 고생과 희생에 대한 짐작, 엄마와 아빠라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존재를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그러나 그들의 말미에는, 마치 인사치레처럼 아이들을 바라보며 건네는 한 마디가 있었다.
“아이들이 참 예뻐요.”
이 말을 마치고서는 “아, 이상하게 왜 눈물이 나지?” 하며 고개를 돌려 올리는 이들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아이들은 참 예쁘다. 그 아이들이 자신의 자녀로 겹쳐 보일 때에는 눈물이 고일만큼이나 예쁘다. 그 눈물이 마치,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요.’라는 말로 들리는 것은 나의 착각일 경우가 더 많겠지만... 이러한 일들이 내 삶에 반복되면서, 어쩌면 철없는 나의 삶이라도 그 자체로 소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자녀를 낳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알고 느끼게 된 것들을 쌓아가며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와 흔적이 모두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에게는, '당신도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보라.'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게 좋았으니 당신에게도 좋을 거예요.'같은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살아가면서 알게 된 것과 느끼게 된 것들을 짐작해 보다가 이내 마음이 아려왔지만 말로 어쭙잖게 내뱉지 못했다. 인정머리 없는 나는 그저 한 번씩 안아주고, 등도 한 번씩 도닥여 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행복한 척도, 행복하지 않은 척도 하지 말고 ‘이렇게도 살 수 있는’ 한 경우로 그들 곁에서 계속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는 나비처럼 탈바꿈하며 거듭날 수많은 시작점이 매 순간 주어진다. '이래서 나는 끝났다'가 아닌, '그러니 살아야겠다'로 바뀌는 순간에 말이다.
네가 태어나던 바로 그날에
사람들이 네 목숨을 천하게 여기고
너를 내다가 들판에 버렸다
그때에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가다가
핏덩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고
핏덩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다
-에스겔 16:5-6-
그러니 핏덩이인 당신.
제발 살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