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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래토드 May 24. 2024

검게 덮여 가림 없이



섬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는, 봄을 가득히 채워서 누리는 기분이 든다. 도시에서는 추위가 가시자마자 더위가 몰려오곤 했는데, 이곳은 한참 동안 신록에 꽃길이다.   


텃밭 고수분들의 봄을 가만히 살펴보니 역시 부지런하고 노련하셨다. 땅 녹기가 무섭게 비료를 올리고 깊이 갈아엎은 땅에 두둑이 쌓이더니, 얼마 뒤 검정 멀칭 비닐이 가지런히 덮였다. 이제 비닐 사이에 작은 구멍이 뚫리고 모종들이 저마다의 간격을 두고 들어앉을 차례다.


나는 올해도 두둑까지는 쌓아놓고 마음속에서 멀칭 비닐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멀칭비닐은 겉흙을 촉촉이 감싸면서 잡초를 예방하고 우천 시 흙 튐도 막아주기 때문에 농부의 중한 노동을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다른 극단적인 문명의 이기들은 쉽게 집어 들면서 이 얇은 비닐이 뭐라고 나는 이렇게 외면하고 있을까? 장마가 지나면 무성해지는 잡초로 또다시 곤란을 겪을 것이 뻔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이유가 없지 않았다.



몇 해 전 마음씨 좋은 한 어르신께서 채소밭이 잘 되었으니 들어와 마음껏 뜯어가라고 불러주셨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서니 과연 잎사귀들이 싱그럽게 피어올라 있었다. 한 여름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서 상추와 치커리를 뜯고 있는데, 곁눈으로 보니 뜨겁게 달궈진 검정 멀칭 비닐에 채소들의 잎사귀 끝이 닿아 치익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싱그럽게 피어오른 속잎들만 보다가 그 겉잎들을 제대로 마주 대하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내게도 텃밭이 생겼지만 멀칭 비닐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선배 텃밭러의 "얘, 그건 필수야!"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꼭 나 편하자고 여린 잎사귀들이 지글거리며 타게 두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텃밭의 낭만이었다. '김을 매다:논밭의 잡풀을 뽑다'는 표현이 왠지 그렇게 좋았다. 멀칭 비닐을 덮어놓으면 김을 매는 수고를 훨씬 덜 수 있겠지만, 나는 싱그러운 밭 곁에 친밀히 앉아서 땅을 고르는 일이 좋았다. 마음에 심긴 잡념도 함께 덜어내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앉으면 머리가 맑아졌다. 마지막으로는, 폐비닐에 관해서였다. 재활용이 쉽지 않은 폐비닐은 매년 농가에서 대량으로 발생해 자연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내가 보태지 않으면 어떨까 싶었다.


결국 올해도, 배부른 소리 하며 멀칭 비닐을 사용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비가 온 다음날은 쭈그려 앉아서 깨알같이 올라온 잡초들을 뽑아내고 호미로 땅을 고른다. 땅의 양분을 끌어올린 잡초들의 수고는 식탁의 반찬이나 텃밭의 거름으로 올려진다. 이들이 약용으로 가치가 있는 것을 깨달으니, 더는 잡하다 생각이 들지 않아 차로도 즐겨 마실 참이다. 땅을 깊이 갈아 얻은 크고 작은 돌들을 모아 텃밭가에 길을 내었다. 이 자잘한 디딤석들은 텃밭을 오가는 내내 잘그락 거리며 수확하는 재미를 돋운다.


밭에 있던 것들이 검게 덮여 가림 없이 저마다 쓰임을 달리하였다.







육아를 시작하면서 맞닥뜨린 가장 큰 유혹은 '트렌드'였다. "얘, 그건 필수야!"라고 텃밭의 멀칭 비닐을 권하듯 매일같이 꽂히는 육아 정보들 말이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 안에 있으면,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그런 트렌드 중에는, 엄마에게 편하고 만족감을 주지만 자녀에게는 베스트가 아닌 선택들도 보였다.


아이들 앞에 영유에서 초반 사립초, 공립초중을 거쳐 특목고라는 코스요리 메뉴판이 놓였지만, 고급진 레스토랑에서 나와 스스로 식재료를 심고 거두어 맛보는, 남들이 보면 속 터질 만큼 느린 길을 선택하게 되면서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이들이 이루어야 할 어린 시절의 성취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실속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가 시작된 목적 중 하나에는 어른들의 실속, 즉 돈이 있었다.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 부모 모두가 일터로 나가게 되자, 집에서 방치되고 있는 아이들을 한 공간에 모아 집단으로 양육하는 방식이 마련된 것이다. 아이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부모처럼 일터로 나가 임금을 벌기에 최적화된 커리큘럼에 따라 학습하게 되었다. 초창기 학교 교육은 그렇게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해 쓸모가 있는 과목으로 채워졌다. 아이들을 위한 사려 깊은 고민으로 개발된 교육 시스템과 유연한 커리큘럼을 가진 학교들도 전후로 등장했지만, 그 흐름이 공교육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초창기 학교가 홈스쿨링을 대체해야 했다면 보다 나은 틀이 있었어야 했는데, 집단 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학교가 더 나은 틀을 갖기는 어려웠다. 공교육의 현저한 틀은 가정이 아닌 장소에서 부모가 아닌 교사를 통해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공통 과목을 공부하는 것에 있다. 애초부터 공교육은 교사와 학생 그 누구에게도 편하지 않은 세팅이었다. 불편할 수밖에 없는 세팅을 두고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려니 여러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사회성을 위해 학교 생활이 필요하다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학교에서 겪은 부정적인 일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한 개인의 사회성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 경우가 많았다. 유순하고 순탄하게 학창 시절을 마친 아이들이 사회에 나아가 오히려 관계의 어려움을 심하게 겪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학교 생활이 유난히 갑갑하고 힘들었던 아이들은 보다 공간감이 있는 사회에서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이 복작이며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경험한다는 이점 외에는, 학교 생활 자체가 아이들의 좋은 사회성을 개발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아이들의 사회성과 집단 교육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바른 사회성은, 그저 타인에게 다가가 말을 잘 섞고 환하고 친절하게 웃으며 자신이 속한 무리의 공동체성을 잘 따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서 사회에 이로운 영향력을 끼치는 소명 의식에 있을 것이다.  


홈스쿨링을 하는 아이들의 경우, 공교육의 틀에서 상당 부분 자유로울 수 있다.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과목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초중고 공교육 과정과, 글로벌 유수한 대학교의 커리큘럼까지도 넘나들 수 있다. 그러나 홈스쿨링을 통해 시도할 수 있는 보다 가치 있는 것은(아이들을 위한 더 나은 목적은), 아이들 각자가 삶을 주도적으로 경영하는 것을 지식의 시작점에서부터 배우는 것에 있다. 아이들은 단순히 어느 대학에 들어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게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지에 관한 청사진을 그리게 된다.







아이들이 뜰에서 놀다가 텃밭에서 나를 찾아낼 때면, 이리 와서 앉아보라 하고 자잘한 일을 함께 해보았다. 잡초를 뽑아 보고, 깊이 박힌 돌도 캐서 옮겨보고, 상추잎을 겉부터 차례로 수확해 보았다.


녀석들이 밭일에 관심을 갖게 된 김에, 땅 한 평을 더 갈아 올렸다. 제 땅이 생긴 아이들은 신이 났다. 손바닥에 원하는 씨앗을 부어 주고 결실할 때까지 스스로 가꾸어 보라고 권했다. 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저들 밭부터 나가서 살펴본다. 늦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텃밭의 돌길이 어린 농부들의 걸음에 더 자주 잘그락 거리며 흥을 돋울 것이 분명하다.


작은 것부터 보살피고 다스려보는 일이 풍성하게 아이들의 마음을 채워간다.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땅이라도, 가꾸는 이의 마음과 노력에 따라 피어오르는 얼굴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지나는 길에, 푸석해 보일지라도 아이들의 밭에 물을 주고 김도 매어 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는다. 거친 한 평의 땅을 경영하며 얻어낸 모든 경험을, 비록 실패일지라도 스스로 오롯이 차지하도록 두기로 하였다. 아이들이 저마다의 성품대로 담대히 경영해 나갈 삶의 밭도 엄마인 나의 공치사로 검게 덮어 가리지 않기로 하였다.


스스로 참된 것을 골라 심을 줄 알고,

심은 바 대로 풍성히 거두는 삶을 맛보게 되기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같이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이사야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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