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kg의 가녀린 체구로 태어난 첫째 딸을 팔에 안고 처음 젖을 물리는 순간 경외감이 몰려왔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한 인간이 맡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구나.'
아직 눈도 잘 뜨지 못하는 이 아기가 이 땅에서 살아갈 시간들이 빠른 속도의 파노라마로 지나갔다. 한 생명의 무게는 그 시간의 무게요, 그 시간이 초래하는 영원의 무게다. 과연 누가 충분한 능력과 자격이 있어 생명을 맡아 양육할 수 있을까?
어쩌면 부모가 되는 일은 우리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이거나 가장 잘못한 일이 될 수 있다. 더욱이 부모에게 상처를 받고 자라난 자녀라면 부모가 되는 것 자체가 떨릴 만큼의 두려움이기도 하다. 최선을 다함에도 때로는 자녀들이 나로 인해 나와 같은 상처를 받는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우리나라 초등학교 과학 교과서는 인간을 동물과 한 가지로 분류한다. 인간이 생육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물들과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유대인들에게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구별된 존재다. 그들이 믿고 있는 창조 이야기는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만드신 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image)을 따라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셨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호흡을 직접 불어넣어 살아있는 육을 가진 영의 존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가진 모든 창조물들에게 처음으로 내리신 축복은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라."였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다른 창조물들과 다른 하나의 축복이 더해졌다. "살아있는 이 모든 것들을 다스려라."
흙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섬기는 존재다. 양분을 내어 풀들을 품고, 그 풀들로 동물들을 살린다. 그런 흙이 신의 모습으로 빚어지고 신의 호흡이 부어지면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존재'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창세기 이야기를 더 이어가보자. 유대인이 아닌 사람일지라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만한 아담과 하와의 그 유명한 선악과 이야기.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창조주의 예언이 있은 후로부터 유대 민족은 끊임없이 에덴을 회복하고 세상을 구원할 여인의 후손, 즉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려왔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마음속에는 한결같은 질문이 있다.
"누구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인가? 과연 누가 그 여인일까?"
성경의 어느 기점마다 등장하는,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가 또 누구를 낳았다는 구구절절한 설명은 바로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들에게 자녀는 '메시아가 될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그만큼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개인의 삶을 뛰어넘는 공동체의 구원을 향한 염원이다.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졌다. 성경에는 머리에 기름을 붓는 방법으로 세워지는 세 직책이 있는데, 그것은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었다. 이 세 직책 모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오해를 풀며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정치와 역사(과거와 미래) 그리고 영적 세계를 아우르며 다스린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다스림'이란 대부분 지배하고 억압하는 모습이다. 역사 이래 오늘날까지도 선한 통치자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창조자가 그리신 다스리는 자의 모습은 달랐다.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한 이유는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가 나를 보내신 이유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며
갇힌 사람들에게, 너는 풀려났다고 말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사야 61:1
메시아는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갇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어진 존재다.
사람의 아들 곧 한 여인의 몸에서 가녀린 아기로 태어난 신이 계셨다. 그는 메시아이자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사람의 손으로 빚어놓은 여느 신들의 모습처럼 강력한 지배자로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를 메시아로 믿는 것이 상당히 어려울 만큼 이 땅에서의 그는 무척 약해 보이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외형이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종교지도자들이 걷기 좋아하는 잘 닦여진 길이 아닌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밟는 거친 길 위에 닿았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감당하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그 신령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그의 삶을 믿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다. 사람이 감히, 신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그리고 그의 말이라면 그것은 진리임에 틀림없다.
언젠가 하버드 대학교에 방문했을 때 도서관에서 흥미로운 책 하나를 발견했다. 랍비 Robert N. Levine이 쓴 책이었다. "There Is No Messiah―and You're It"라는 제목이 무척 흥미롭고도 아슬아슬했는데, 하버드 대학교 신학과정의 자유로운 학풍은 익히 들어왔던 터라 신학부 서가에 꽂혀있던 이 책의 내용을 일단 넘겨 짚어보았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볼 수록 저자가 자극적이고 위험한 사상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책의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We are taught that every one of us is created in the divine image. All of us can be holy through imitating God…. So, you don’t have to look around or look away. You don’t have to wait for someone to come and do what you were put on this earth to do in the first place. Judaism empowers you, as one of God’s anointed ones, to do more than you ever dreamed possible."
나는 사람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로, 곧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생아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는 그 순간에 떠올린 영원의 시간이 나를 각성시켰다.
‘아, 내가 사람의 어미구나.’
아이들이 얼마전에 용돈을 관리해 보겠다며 책을 마련했다. 그 책에 자신들이 얼마를 가지게 되었으며 어디에 얼마를 사용했는지를 기록했다. 그리고 표지에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목표를 적어두는 공간도 있었는데, 둘째 딸의 기록을 보니 모두 누군가를 도우려는 것들이었다. 남을 돕겠다는 결심이 정말 훌륭하다고 딸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고서도, 못내 걱정이 되어 네 쓸 것을 위해서는 목표한 바가 없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 지금 저는 엄마 아빠가 필요한 것들을 주셔서 충분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저보다 이 돈이 더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 모두 모아보려고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여러모로 부족한 부모 아래 자라면서도, 충분하다 말해주는 아이에게 참 고마웠다.
여린 순같은 자녀들은 이처럼 무언가를 애쓰지 않고도 의도 없이 긴 호흡으로 내뱉는 말 한마디를 통해 나의 가난한 마음을 부요하게 하며, 갇힌 생각에서 놓이게 한다. 이렇게 자녀들은 메시아의 구원을 삶 속에서 담아내고 있었다.
어쩌면, 온전치 못한 나의 삶이 자녀의 삶을 통하여 비로소 완성되어 가도록 영원의 시간을 선하신 분의 섭리에 내어주는 일이 바로 부모의 인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부모도 결코 한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만큼의 능력과 자격을 갖출 수 없지만,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통해 완성되어 가는
거듭난 삶으로
순전하게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함께 하는 시간이 있다면
우리, 모든 자녀들은 부모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