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님! 제가 3개월은 피임하자고 했는데! 남편분과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담당의 선생님께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소리치셨다. 첫 아이 이삭이를 태에서 떠나보낸 뒤 두 달 만에, 우리 기쁨이가 급히 찾아와 준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민망함도 뒤로하고 커다래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유산의 아픔이 새 생명을 잉태하는 충만한 기쁨으로 씻겨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아기의 심박 소리를 듣는 그 진한 감동에 이어 먹는 입덧이 시작되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침대맡에 놓아둔 시리얼바를 입에 욱여넣고 꿀꺽 삼킨 다음에야 일상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커피, 초콜릿 그리고 하이힐과도 잠시 이별했다. 며칠 동안 밤을 새워가며 일하는 습관도 버렸다. 대신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카페인 없는 차를 마시며 배 위로 볼록볼록 올라오는 아기의 팔꿈치와 발에 손바닥을 맞추었다. 졸리면 잠을 자고 배가 고프면 양껏 먹었다. 이전에는 결코 편하게 누리지 못했을 너그러운 쉼이었다.
출산 예정일을 3주 앞둔 이른 새벽,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일어나 보니 허벅지로 미지근한 양수가 흘러내렸다. 곤히 자고 있던 남편을 살살 깨워 차에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양수가 터졌지만 진통이 충분하게 오르지 않은 상황이었고, 유도분만을 시작하고서도 아기가 내려오지 못했다. 자연분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병원이었지만 결국 진통 이틀 만에 아기와 산모의 건강을 위해 제왕절개 수술을 권하셨고, 우리도 고집부리지 않고 수술을 결정했다.
그렇게 기쁨이(태명)는 2.3kg의 여린 체구로 이 땅에 태어나 부족한 우리의 귀한 딸이 되어주었다. 딸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고도 짱짱하게 새로운 환경을 견뎠지만 아무래도 젖을 무는 힘이 부족했다. 수술 후라 젖이 잘 돌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분유를 삼키지 못하는 딸을 위해 아기들 반응이 좋다는 분유로 계속 바꾸어 먹여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애타는 마음에 모유를 짜서 숟가락으로 아기 입에 부어 넣어주면서 병원에 갈 때마다 아기 몸무게가 더 늘어야 한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유선염을 끼고 백일이 지나고서야 드디어 “이제 아기 체중 좋아요.”소리를 듣고 한참을 정신 나간 것처럼 딸을 안고는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했다.
아기의 첫돌을 조금 남긴 무렵, 꾀죄죄한 몰골로 남편의 셔츠를 다리미로 다리던 중이었다. 다림질을 끝낸 셔츠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는데 분명 저만치에서 놀잇감으로 놀고 있던 딸이 어느새 두루뭉술 기어와 다리미를 내 허벅다리에 대고 누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신기한 아기는 엄마를 따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살이 지져지는 냄새와 소리는 처음이었는데 아픔은 느껴지지 않고 순간 딸이 다쳤을까 봐 정신이 아득해졌다. 방실 방실 웃고 있는 딸의 손에서 얼른 다리미를 받아 들고 코드를 뽑아 멀찍이 놓은 뒤에 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폈다. 천만다행으로 딸은 어느 곳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안심이 되어 눈물이 핑 돌았다. 습한 여름에 나의 허벅다리는 항생제도 잘 쓰지 못한 채로 오랫동안 진물이 흘렀지만, 다치지 않은 딸을 떠올리면 그저 다행이라 아픈 줄도 몰랐다.
그렇게 '처음 엄마' 시절의 나는, 밥도 잘 먹지 못하고, 잠도 잘 자지 못하고, 잘 씻지도 못하는 못난이였다. 그러면서도 잔뜩 주눅 들어 아이에게 늘 죄책감을 느끼는 모지리였다. 이 작고 연약한 생명을 돌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숱하고 당연한 난관 앞에서, 내가 서툴러서... 내가 준비가 덜 되어서... 내가 잘못해서... 라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어쩌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그저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다독였어야 했지만 미련하게도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살아오면서 늘 그랬듯이 '너는 강해져야만 해.'라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채찍질만 할 줄 알았다.
당시 남편이 늦은 나이에 사회 초년생처럼 신입으로 들어간 외국계 대기업의 업무는 밤낮이 없었고, 새벽에 집에 들어오는 일도 잦았다. 직장 상사의 무리한 요구가 훗날 PTSD로 남을 정도로 남편 역시 심신이 많이 피로한 상태였다. 나는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입에 달며 홀로 육아를 감당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아파트 난간에 매달려 서 있었다. 내가 아무리 강하게 굴었어도 호르몬과 맞서 싸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육아는 강하다고 꺾이지 않는 물리적 논리가 적용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더욱이 육아는 옳고 그름을 가늠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육아는 나침반 없이 들어선 미지의 길 위에서 이유 없이 가해지는 숱한 매질을 대꾸 없이 버텨내는 매집에 가까웠다.
여린 자녀를 대하는 이 귀하고 섬세한 일 앞에서, 결국 나는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강한 여자' 플래그를 내려놓았다. 이제 강한 여자가 아닌 '강인한 어머니'가 되어야 했고, 강한 여자와 강인한 어머니는 그 완성된 결이 매우 다른 것이었다. 내 안의 강인한 어머니는 자신이 연약함을 인정하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내게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숨김없이 말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내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하나님과 당신의 도움이 간절하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아이를 낳은 지 두 해가 지난 어느 날, 드디어 나는 도심의 어느 거리에 홀로 서있게 되었다. 나의 위기를 인정한 남편의 자상한 배려였다. 예술 공연을 앞둔 설렘으로 가득한 거리에서 한 카페로 들어가 메뉴판 앞에 서 있는데, 무엇을 골라야 할지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나의 취향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아득한 머릿속을 헤쳐가며, 두 번이나 메뉴를 바꾸고서야 주문을 마쳤다. 날이 바짝 서있던 싱글 시절, 고민도 없이 에스프레소 트리플샷에 쇼콜라 케이크이었던 나의 취향은 어느새 고구마 라테에 무화과 타르트로 변해있었다. 모유수유 이후로 나의 취향은 아기의 볼살처럼 유하고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그때 거리 위로 흘러나오는 멜로디.
김윤아 님의 곡,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그 마음의 사치"
사랑.
지나도 나면 아무것도 아닐, 그 마음의 사치에
가진 모든 것을 다 소모해 버리고
그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끔찍한 고통에서 헤어 나온 후의 그 담담함을 정확히 표현해 낸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더운 가슴도 찬란한 청춘도 내일이 없는 듯이 소모해 버리고
'그래, 푸르른 봄이 흘러가고
검붉은 핏빛의 가을이 시작되었지
그조차도 흘러가
시린 눈 내린 들판에서 거름으로 녹아지고
어느샌가 신록의 아리고 여린 푸르름이
나의 몸뚱이 위에서 돋는 것을 보게 되었지
그 순들의 흔들림마저 아까워
혹여나 뿌리내리지 못할까
나는 아주 숨죽이며 가라앉아 있었지
그럼에도,
그 소멸과 고통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죽음만큼 힘을 다했던 시간들이
세상에...
이 순간 떠올려지지도 않아.'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생각을 이어가던 중에 갑자기. 딸의 말갛게 웃는 얼굴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젖냄새 물씬 나는 옅은 숨결과 머리카락이 그리웠다.
이 얼마 만에 누리는 만찬이었던가! 그러나 나는 음식이 아직 남아있는 그릇을 뒤로하고 딸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 누가 이건 삶의 터무니없는 소모이며 낭비며 사치라고 힐난할지라도 털끝하나도 개이치 않을 만큼, 그 순간 딸과 남편이 몹시도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