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너무 빨리 세상과 타협했고, 그 결과 아버지 세상에 향기는 없었다. 이른 새벽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 OO어매 집에 있는가? 잔 나와보소. 어이? OO어매 안에 있으면 언능 나와보랑께. 밖은 짙은 어둠으로 조용한데 낯선 아줌마와 거친 아저씨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방에 쳐들어올 기세로 오빠 이름을 내세워 엄마에게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고 있다. 공기마저 숨죽인 새벽 알 수 없는 불청객의 성난 목소리에 어린 여자아이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놀란 건 옆에 있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괜찮다고 나를 안심시키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 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으려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조용히 대화가 오고 가는가 싶더니, 화난 아줌마의 신세 한탄 소리가 들려왔고, 뒤 이어 아저씨의 거칠고 무거운 목소리 "아따 아짐 보고 돈 빌려줬제, 누가 아제보고 돈 빌려줬다요. 진직 올라했는데 아짐 보고 참았써라" "인제 더는 못 기다링께 언능 답을 줏시오" "언제까정 갚을라요"
내내 듣고 있던 엄마의 원망 가득한 한 만디 "으째 상의도 없이 그 큰돈을 저 사람한테 꿔줬다요" "나는 모르겠어, 본 적도 없고 써본 적도 없는 돈을 으트게 갚는다요"
엄마 한마디에 아줌마의 성난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엄마 머리채를 잡아채듯 날카롭게 들려왔다.
"아따 시방 뭐라고 했쏘, 내 돈을 빌려주고이라고 맘고생을 해야 쓰가, 아저씨는 어디 갓 오 돈 꿔간 사람이 나오서 말하라고 하씨오. 동네 사람들" 기어코 아줌마는 그 새벽에 동네 사람들을 다 깨울 판이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술에 취해 자고 있던 아버지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두려움에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가는 아버지를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만하시오, 내가 으트게 해서든 얼른 갚을랑께 그만하시오, 동네 사람들 다 깨것오, 아따 그만하시오"
엄마는 쩔쩔메며 아줌마를 달래고 있었다. 일은 그때 벌어졌다. 엄마가 아줌마에게 매달려 사정을 하는데 아줌마가 엄마를 뿌리쳤고, 그 바람에 엄마가 마루에서 떨어져 넘어졌다. 문을 열고 나가던 아버지는 그 장면을 보게 되었고 반사적으로 달려가 아줌마를 밀쳤다. 넘어진 아줌마는 이내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서러운 울부짖음은 새벽 담을 넘어 온 동네로 퍼져 나갔다. "동네 사람들 여그 좀 나오보소 사람 잡네, 이내가 사람 잡아"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저씨가 갑자기 아버지 멱살을 잡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시방 어따 손을 댔오, 못 쓰것네" "어디 나도 한번 밀어보씨오"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제, 상종 못하것오"
"어디 젊은 넘이 경우도 없이 이라고 행패여" "이거 나라앙" 아버지는 아저씨에게 멱살이 잡혀 옴짝달싹 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아제 그만하시오,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을 그리고 하면 안 되지라"
엄마는 쓰러진 몸을 일으켜 아저씨에게 그만하라고 사정했고, 넘어진 아줌마는 억울해 못 살겠다며 엄마에게 달려들어 엄마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아버지는 엄마 머리채를 잡은 아줌마에게 욕을 퍼부었고, 아버지 멱살을 잡고 있던 아저씨는 아버지 멱살을 풀어주는가 싶더니 이내 "착, 착" 커다란 손으로 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아버지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풀썩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저씨, 우리 아버지 때리지 마씨오" 문틈으로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여자아이는 어느새 마루에 나와 울면서 앙칼지게 아저씨를 밀쳐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성을 잃었던 어른들은 이내 주위를 살핀다. 싸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에 온 동네가 들썩들썩 시끄러움에 새벽이 도망쳐버렸다.
밤새 그 난리를 쳤는데 엄마는 새벽부터 장사를 나갔다. 이곳저곳 성난 상처가 가득한 집에서 아버지는 안방에 앉아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다.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여자아이는 애써 자는 척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이 덜덜 떨렸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작지만 깊게 들려오는 아버지 한숨 소리만 모른 척 듣고 있어야 했다.
"막내야, 자냐? 잠 안 오면 그냥 인나도 돼야"
"아부지가 아부지 같지 않아서 미안흐다"
여자아이는 조용히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웠다. 쿵쾅거리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한동안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고, 여자아이는 이내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에게 베개를 베어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아버지는 조용히 마루에 걸터앉았다. 동이 트는 아침까지 아버지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고 조용히 혼잣말한다.
'빙신, 지 식솔들도 못 챙기믄서, 내가 언능 죽어야 쓴디' 아버지 눈에서 무거운 물이 뚝뚝 떨어진다.
"아부지 나 배고파"
그날 아버지의 슬픔은 고스란이 나에게 와닿았고, 어린 여자아이는 다짐했다.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그리고 꼭 훌륭한 사람이 돼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겠다고.
PS : 아버지는 내가 뒤뜰에 있는 살구나무에 오르는 걸 싫어하셨다. 살구나무에 오르면 심하게 성을 내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졌고,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후천적 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본인의 장애를 인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러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고, 아버지 청춘은 사라졌다고 한다. 꿈은 피워보지도 못하고 져버렸다고 한다.
한 줄 요약 : 내가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던 이유, 당신의 청춘이 못내 아쉽고 외로워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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