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슈테판 츠바이크-
어느 시대에나 어떤 불행한 집단을 선별해서 그들에게 밀린 증오를 집단적으로 분출한다는 사실을 카스텔리오는 알고 있었다. 때로는 종교 때문에, 때로는 피부 빛깔 때문에, 종족 때문에, 출신 때문에, 사회적 이상 때문에, 세계관 때문에 작고 약한 어떤 그룹이 더 크고 강한 그룹에 의해서, 인간성에 잠재된 파괴 에너지의 대상으로 선별되는 것이다. 동기가 되는 구호는 바뀌어도, 비방, 멸시, 파괴의 방법 자체는 그대로이다.
-카스텔리오-
이 위험한 순간에 분명하게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흉악한 짐승처럼 사냥하고, 도둑이나 살인자처럼 잔혹하게 고문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카스텔리오-
칼뱅은 루터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개신교의 중요한 인물로 알려졌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교회 정부를 도입했고, 극단적인 원칙주의와 엄격한 도덕적 생활을 강요했다. 칼뱅 그 자신 역시 철저한 원칙 주의자였다.
동시대 사람이었던 카스텔리오는 칼뱅식 교회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종교적 관용을 주장했다.
두사람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제네바에서 세베르투스가 이단으로 처형되면서 시작됐다. 칼뱅이 세베르투스의 처형을 직접 명한 것은 아니지만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를 이단을 몰아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칼뱅이 세베르투스 처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다. 칼뱅은 종전 자신이 말한 내용을 숨기고 고치면서까지 세베르투스 처형을 밀어붙였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칼뱅이 세베르투스를 처형하자 카스텔리오는 칼뱅을 비판했다.
카스텔리오에게 배울 점은 절대권력을 가졌던 칼뱅에 반기를 드는 용기만이 아니다. 그는 이 책 제목처럼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인정했고,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혐오를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 이야기와 혐오라는 주제는 투자와 전혀 관계없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의외로 투자자 입장에서 칼뱅과 카스텔리오의 갈등 과정을 보고 배울 것이 많았다.
카스텔리오의 말처럼 사람들은 어떤 시대에나 집단을 가르고, 타 집단을 혐오하고 분노하며 박해한다. 이는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인간의 생존시스템 탓이다.
사람들은 카스텔리오의 말처럼 종교, 인종, 종족, 출신 등으로 집단을 구별 짓는다. 마이클 본드의 팬덤의 시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최소 집단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아주 작은 자극만 있어도 자신과 남들을 분류하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을 누구보다도 선호한다. ‘우리’와 ‘그들’로 이루어진 움직임, 즉 집단주의는 사회생활에서 상수常數가 된다.”
“집단은 자부심과 허영심을 키우고,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자랑하고, 자신의 신성을 높이고, 외부인을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각 집단은 자신의 습속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집단에 다른 습속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계기로 경멸을 작동시킨다.”
사람들을 구별하고, 내적 집단에 더 큰 호의를 느끼며, 타 집단을 배척하고 경멸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본성에서 나오는 타집단에 대한 혐오에서 감춰진 것은 바로 자신의 수치심이다. 타 집단을 혐오하고 경멸하는 것은 자신의 집단이 타 집단보다 우수하다는 착각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자신이 속한 집단이 우수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행한 혐오가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 놓인다면 더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당신은 혹시 어떤 주식 종목이 폭락했을 때 그 주식을 보유한 주주들을 조롱 해본적이 있는가? 밈주식을 비롯해 급등주나 추세를 탄 대장주가 폭락했을 때 주주들을 비웃거나 조롱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행동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 즉 폭락한 주식의 주주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혐오로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들과 나를 구분함으로써 나의 생존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렇게 집단을 구분하는 행위는 오히려 앞으로의 생존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조롱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의견을 가졌는지, 그리고 왜 실패했는지를 분석하고 공부해보는 것이 더 도움된다. 게다가 타인과 나를 분류한다는 행위는 이성적 판단에 방해가 된다. 그들이 겪었던 실패가 우리의 성공으로 오해할 경우 확증편향에 빠져 다음 차례가 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삶과 투자는 조금 다르다. 삶에서는 집단이 필요하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투자에서는 꼭 집단이 필요하지 않다. 집단과 나를 따로 두고,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가족이나 이웃 간의 교류가 적다는 이유로 요즘 세대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더 세분화되고 다양한 집단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간은 작은 자극만으로도 사람을 분류하고 집단을 만들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무한하게 넓은 세상에서 수많은 분류, 수많은 집단에 생겨나고 있다.
집단에 소속된 사람은 정체성을 갖는데 이를 “사회적 정체성”이라 부른다. 한 사람은 복수의 사회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기에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는 더 많은 사회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정치, 종교, 인종, 민족, 출신과 같은 분류가 많았다면 이제는 거기에 더해서 작은 의견 하나하나에도 집단이 생겨난다.
2024년 11월 5일 미국 대선이 치러진다. 정치적 이념은 서로를 분류하고, 집단을 가르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갖췄다. 그만큼 서로를 혐오하고, 서로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무시한다.
하지만 진정한 투자자라면 정치와 이념, 사상과 같은 것들로부터 투자를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됐을 때 나에게 유리한가? 혹은 어떤 사람을 지지하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다. 투자자로써 에너지를 혐오와 편가르기에 쏟기보다 투자에 쏟아야겠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슈테판 츠바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