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감정론 -애덤 스미스-
"우리 자신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대상에 의해 발생하는 모든 격정의 적정성은 즉 방관자가 공감할 수 있는 격정성의 정도는 일종의 중도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경제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실제 사람들의 삶과 경제학이 갖는 괴리만큼이나 많은 오해를 받는 인물이다.
그의 저서 국부론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애덤 스미스를 오해하는 이유는 국부론을 단편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특히 "보이지 않는 손"은 책에서 단 한 번 언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시장 만능주의자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경제활동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도덕감정론에서는 이기심만큼이나 공감, 자비, 정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애덤 스미스가 경제와 도덕적 가치를 분리했다는 오해가 많지만, 그는 누구보다 도덕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다.
애덤 스미스와 관련된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오늘 다뤄볼 독서조각은 도덕감정론의 한 부분이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공감을 당사자와 방관자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감정과 방관자 사이 감정의 합집합이다. 당사자가 어떤 고통이나 격정을 느끼는지보다, 방관자가 이를 얼마나 공감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한 사람의 각종 감각기관의 기능, 즉 관능은 그가 다른 사람의 유사한 관능을 판단할 때의 척도가 된다. 나는 나의 시각으로 당신의 시각을 판단하고, 나의 청각으로 당신의 청각을 판단하며, 나의 이성으로 당신의 이성을 판단하고, 나의 분개로써 당신의 분개를 판단하며, 나의 애정으로써 당신의 애정을 판단한다. 그것들을 판단할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가질 수도 없다."
결국 방관자는 자신이 가진 만큼만, 혹은 느끼는 만큼, 아는 만큼, 보는 만큼, 듣는 만큼만 당사자에게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방관자의 입장에서 당사자에게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도록 교육받는다. 이것이 역지사지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방관자의 역지사지만큼이나 당사자의 역지사지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와 마찬가지로 당사자로 하여금 방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한 남자가 전기톱에 팔이 잘리기 직전이다. 이때 당사자만큼이나 방관자도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전기톱이 당사자의 팔에 닿을 때 방관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고 눈을 질끈 감는다. 당사자의 팔이 잘리고 그가 고통스러워한다. 방관자의 공감은 여기까지다. 당사자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면, 방관자는 그의 고통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점차 비명이 듣기 싫어진다. 방관자는 상상을 통해 어느 정도 고통을 공감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감은 점차 혐오로 변한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안타깝지만, 모든 격정의 적정성은 방관자가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우리 자신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대상에 의해 발생하는 모든 격정의 적정성은 즉 방관자가 공감할 수 있는 격정성의 정도는 일종의 중도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너무 슬픈 일이 있어도,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어도 방관자의 입장에서 중도의 격정만큼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상대방의 기분을 완벽히 알 수 없다. 상대가 어떤 경험을 했고,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으며,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느끼는 공감은 이 모든 요소의 상호작용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의 공감을 억지로 이끌어낼 수 없다. 그가 어느 정도의 격정에 공감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방관자의 입장에서뿐 아니라 당사자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
투자자로서 공감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투자와 공감은 별개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부 투자자들은 산업, 종목, 투자방식에 대해 편향된 접근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는 기술주는 절대로 투자하지 않겠다"라고 단정 짓는 경우가 그렇다. 배당주, 성장주, 테마주, 단기투자, 장기투자, 패시브 투자 등 투자하지 않을 분야를 미리 정해두는 태도는 위험할 수 있다.
투자 사이클을 고려한다면, 특정 분야에 투자하지 않더라도 관심은 꾸준히 가져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약간 다른 주제다. 투자자로서 여러 분야에 관심을 두고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당사자의 격정의 적정성이 중도일 때 방관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격정이 과하거나 부족하면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과 개인 간의 공감 문제다.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집단은 중도의 격정일 때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 이미 형성된 집단도 그렇고, 중도적인 의견으로 집단이 형성되기도 어렵다.
개인과 개인 간의 대화에서는 나의 주장이 너무 강하면 상대방이 적절히 공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집단의 경우, 강한 주장은 오히려 환영받는다. 반대로 중도적인 주장은 집단 내에서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집단에서 중도는 힘을 가지기 어렵다.
왜 그럴까?
집단에서 감정 전달은 개인 간의 감정 전달과 다르다. 첫째, 집단에서 감정을 전달하려면 구성원의 주목을 끌 수 있는 강렬한 격정이 필요하다. 중도적인 표현으로는 집단 구성원의 관심을 얻기 어렵다. 둘째, 집단은 강렬한 격정이 퍼질 때 전염되는 특성을 보인다. 중도적인 의견보다 강한 주장이 더 빨리 퍼진다. 셋째, 집단은 사실에 왜곡된 상상력을 더해 사건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증폭된 사건을 이끌어내는 사람은 집단 내에서 영향력을 얻는다. 넷째, 집단은 목적에 의해 정체성을 강화하며, 다섯째, 군중은 합리성보다 감정에 의존한다. 따라서 중도의 의견은 집단 내에서 인정받기 어렵다.
귀스타브 르봉은 군중심리에서
"군중은 온후한 지도자보다 자신들을 강하게 억압하는 압제자에게 동조한다"고 말했다. 집단이 중도를 배척하는 이유는 정신과 의견을 단일화해야 집단 간 차별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로서 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집단의 공감은 개인의 관점과 다르다. 나만의 관점을 잃는 것은 투자시장에서 다수가 된다는 뜻이고, 다수는 시장에서 실패한다. 시장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마이너스 게임이다. 소수가 벌고 다수가 잃는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집단에서 벗어나야 한다.
집단에서 나와 시장을 개인의 관계로 바라본다면 더 나은 투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