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사랑하는 그녀 클로이와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간 그는 어느 날 비롯된 클로이의 극심한 통증에 몹시 걱정이 된다.
'뭔지 모르겠어. 머리가 갑자기 심하게 아팠어. 콱콱 쑤시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닐 거야. 아, 아냐 젠장, 또 시작되네.'
통증을 호소하는 클로이를 보다 못해 그는 달려가 의사를 수소문해서 불러왔다. 그녀의 고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닥터 사베드라는 안헤도니아라고 진단했다. 영국 의학협회에서는 이를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갑작스러운 공포’에서 비롯되는 증상으로, 고산병과 유사하다고 규정했다. 스페인의 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이곳의 전원적인 풍경 속에 들어서면, 갑자기 현실에서 행복을 실현할 가능성이 눈앞에 나타난다. 하지만 그 순간, 그러한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격한 생리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헤도니아’는 행복, 쾌락, 즐거움을 의미한다. 철학에서 쾌락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단순한 순간적 만족이 아닌, 고통이 없는 상태로 정의했다. 그들은 쾌락이 지속 가능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라 여겼다.
반면, 쇼펜하우어는 쾌락을 고통의 부재로 보았다. 그는 고통을 인간 삶의 상수로 규정하고, 쾌락을 변수로 여겼다. 즉, 인간은 항상 결핍과 욕망을 느끼기 때문에, 욕망이 충족될 때 일시적으로 고통에서 해방되지만 곧 새로운 욕망이 생기면서 다시 고통 속으로 빠진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자연의 경관을 바라보며 욕망의 의지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야말로 잠시나마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순간이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클로이가 느낀 감정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스페인의 전원마을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완전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곧,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고통에 빠진다. 아름다운 자연을 평생 보고 싶다는 욕망이 새로운 고통이 된 것이다.
너무나 행복한 순간을 즐기면서도, 이 행복이 끝날 것임을 알기에 슬퍼지는 감정. 어쩐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이 감정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매주 찾아오는 월요병, 아니, 일요병이 바로 그것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힘들게 일하고, 주말에는 온전히 쉴 수 있는 직장인을 떠올려보자.
일주일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아마도 금요일 저녁이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의 휴식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일까? 월요일 아침? 아니다. 일요일 밤이다. 일요일은 분명 쉬는 날이고, 신체적으로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틀 동안 충분히 쉬었으니 몸과 마음이 편안할 법도 하다.
하지만 지금 이 휴식이 내일이면 끝난다는 사실이 불현듯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월요병이 아니라, 일요병이 더 힘들었다. 출근하는 월요일보다, 출근 전날인 일요일 밤이 더 고통스러웠다. 휴가도 마찬가지다. 긴 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는 날보다, 출근하기 전날 밤이 더 우울했다.
방학도 그랬다. 학교에 가는 개학 첫날보다, 방학 마지막 날이 더 힘들었다.
클로이가 느낀 안헤도니아의 감정을 나도 매번 느꼈다. 너무나 좋은 순간을 만끽하면서도, 그것이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 가져오는 감정의 혼란. 나만 그런 걸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까?
월요병과 일요병 중에서 어떤 순간이 더 힘들었는가?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 순간이 고통스러운가? 아니면 일요일 밤,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는 순간이 더 힘든가?
월요병은 신체적으로 힘든 것이고, 일요병은 정신적으로 더 힘든 것은 아닐까?
클로이가 느낀 안헤도니아, 그리고 내가 경험한 일요병. 이 둘은 현재의 행복보다 미래의 불안이 만들어낸 고통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투자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앞으로도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게 될 주제, 바로 손실회피 편향이다.
프랑스의 수학자 루이 바슐리에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상품 가격 변동을 조사했다. 그는 가격 변동이 특정한 패턴 없이 무작위로 움직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미래의 가격을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훗날 ‘랜덤워크 가설’의 시초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1960년대 들어 주가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기술적 분석이 유행하면서 바슐리에 박사의 연구가 다시 조명되었다.
당시 연구자들은 주가의 움직임이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이 발견한 브라운 운동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브라운 운동이란, 액체나 기체 속에서 미세한 입자들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현상을 뜻한다.
즉, 주가 역시 예측할 수 없는 무작위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학계는 기술적 분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증명하는 연구를 쏟아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차트를 참고했다.
이후 학계의 관심은 기술적 분석에서 기본적 분석으로 옮겨갔다. 과연 기본적 분석을 활용한 펀드매니저들은 시장을 이길 수 있을까? 이들의 실적을 분석한 결과, 예상과 달리 대부분의 펀드매니저는
시장 수익률을 밑도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어서 학계는 뮤추얼 펀드와 증권 분석 전문가들의 실적까지 조사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기술적 분석뿐만 아니라, 기본적 분석을 활용하는 전문가들도 시장 평균을 초과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유진 파마, 리처드 롤을 비롯한 학자들과 노벨상을 수상한 마셜 블룸, 머튼 밀러, 윌리엄 샤프, 마이런 슐즈 등의 금융학자들은 공학적 모델을 무기로 월스트리트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효율적 시장 가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은 주가를 결정하는 모든 요소가 합리적이고 똑똑한 투자자들에 의해 분석되며,
새로운 정보는 즉각적으로 주가에 반영된다고 본다. 이론적으로 주가는 항상 합리적인 수준에서 형성되며, 어떤 편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이를 기반으로 한 투자 모델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엄청난 자금이 이러한 모델을 따르는 펀드로 유입되었다. 모두가 이론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1987년 블랙 먼데이, 1994년 롱텀 캐피탈 파산, 2000년 닷컴 버블,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 효율적 시장 가설대로라면 주가는 항상 합리적이어야 했다. 따라서 시장이 과열되거나 급락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반복적으로 버블이 발생했고, 그 버블이 터지면서 엄청난 폭락이 뒤따랐다.
심지어 효율적 시장 가설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모여 만든 롱텀 캐피탈 매니지먼트(LTCM)의 파산은, 그들의 이론이 현실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효율적 시장 가설이 간과한 요소를 설명하기 위해 전망 이론을 발표했다.
이들은 기존 경제학이 가정하는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판단한다’는 전제를 반박했다. 전망 이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손실회피 편향이다.
같은 금액이라도 10만 원을 벌었을 때의 기쁨보다, 10만 원을 잃었을 때의 고통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손실을 피하려는 본능 때문에 더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
이는 투자자의 행동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2020년 자본시장연구원에서 김민기, 김준석 연구원이 발표한 '개인투자자의 행태적 편향과 거래행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 투자자들은 손실 중인 종목은 팔지 않고, 수익 중인 종목은 빠르게 매도하는 경향을 보였다.
보유 기간과 상관없이 이익이 발생한 종목은 매도 비율이 손실 종목의 두 배가량 높게 나타났다. 문제는 이후 주가의 흐름이었다. 이익을 보고 팔았던 종목들은 이후에도 상승하는 경향이 강했고,
손실이 나서 버티던 종목들은 계속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오를 주식은 빨리 팔고, 내릴 주식은 오래 보유하는 비효율적인 투자가 이루어진 것이다.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될까? 만약 1만 원에 매수한 주식이 현재 2만 원이 되었다고 가정하자. 만약 이 주식이 10만 원까지 간다는 확신이 있다면, 누구도 매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격이 오르면 ‘앞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매도하게 된다.
현재의 이익을 확정하는 것이 손실을 보는 것보다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반대로 손실 중인 주식은 떨어진 가격을 인정하기 어려워 계속 보유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효율적 시장 가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장에는 수많은 똑똑한 투자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시장에 참여하는 투자자들은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손실을 피하려 하고, 수익을 확정하려는 심리적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행동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시장 전체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결국 랜덤워크 가설이 말하는 ‘시장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맞을지 몰라도, ‘이론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접근법은 틀린 것이다.
클로이는 스페인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내가 느꼈던 일요병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쉬고 있었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월요일을 걱정하며 불안해했다. 현재의 행복보다 다가올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투자자들이 손실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시장을 비합리적으로 만들고, 그것이 우리가 마주하는 시장의 본질이자 투자자의 주식 수익률을 망치는 주범이다.
클로이가 느끼는 고통도, 내가 느꼈던 일요병도 실제로 내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 걱정이고 한낱 불안일 뿐이다.
* 모든 주식에 똑같이 적용할 수 없습니다. 손실을 버텼을 때 더 빛나는 종목도 있습니다. 그게 어떤 종목인지는 투자자 본인이 더 잘 알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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