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이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자신에 대해 선악의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일시하면서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를 의미한다."
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930년, 유럽에서 충격적인 책 한 권이 출판되었다. 스페인의 철학자이자 정치인이었던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쓴 대중의 반역은 당시 유럽, 나아가 전 세계를 뒤흔들 거대한 사회 변화를 예고하며 이를 날카롭게 비판한 책이다.
그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집단, 즉 대중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은 어떠한 성찰도 없이 도덕적 책임감을 내려놓은 채 자신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물리적 압력을 행사하고, 자격을 갖춘 소수가 누려온 것들을 강탈하려 한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비판하는 대중은 정확히 어떤 집단일까? 그는 사회를 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대중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엘리트는 단순히 부나 계급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엘리트란 자율적 성찰과 도덕적 책임감을 갖추고, 자기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은 문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며,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하는 소수의 존재들이다. 그 길은 육체적일 수도, 정신적일 수도 있지만, 핵심은 독립적인 사고에 있다.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 바로 그것이 엘리트와 대중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물론 기존의 귀족이나 상류층에서 엘리트가 나올 가능성이 더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일 뿐, 환경을 극복한다면 누구나 엘리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엘리트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중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과 성찰이 요구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역시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한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인간이 가진 재산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인격, 기질, 도덕성과 같은 본질적인 요소, 물질적 소유, 타인의 평가다. 이 중 본질적인 요소는 타고나는 것이므로,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인간은 타고난 본성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며, 같은 대상을 두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한 엘리트는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특별한 기질을 타고난 존재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일반 대중이 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시를 접했을 때, 평범한 사람들은 시인의 멋진 경험을 부러워하는 데 그친다. 반면, 엘리트는 시인의 상상력과 창작 과정에 감탄하며 본질적인 의미를 탐구하려 한다.
현대의 유행을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대중은 여행 유튜버가 외국을 여행하는 것 자체를 부러워하지만, 엘리트는 여행을 기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 감탄한다. 같은 경험을 해도 다르게 느끼는 것은 결국 타고난 본성과 기질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타고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성이 정해져 있기에 대중은 대중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설령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 해도, 정신적 교양이 부족하다면 결국 대중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부단한 노력을 통해 이를 어느 정도 억제하며 살아갈 수는 있다. 즉,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한 엘리트의 자기 성찰과 도덕적 책임감을 가질 수는 있으나, 문명을 발전시키는 역할까지 수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인간이 내면적 노력으로 변할 수 있다고 본 반면, 쇼펜하우어는 변화는 불가능하며 다만 제어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을 ‘자연인’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성찰 없이 사회가 제공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소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치 수렵과 채집을 하던 원시인처럼, 대중은 문명이 만든 기술을 소비하며 그 혜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들은 깊이 있는 성찰 없이 표면적인 정보에만 반응하며, 문명의 발전이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은 결국 불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대중은 원리에 대한 관심이 없기에, 당연하게 누려오던 혜택이 사라질 때 불만을 품게 된다.
예를 들자면, 대중은 인플레이션에 취약하다.
완화적인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실행되면 시중에 화폐가 많이 풀리고 이자율이 낮아지면서 대출을 쉽게 이용할 수 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당장의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완화적인 정책은 결국 물가 상승을 초래하고, 자신들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이후 닥쳐올 문제에는 다시 정부와 중앙은행을 탓하며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 Q84』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중요한 것을 손에 넣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돼. 그게 세상의 룰이야."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며, 곧 책임이다. 하지만 대중은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지 않는다. 자신이 얻은 혜택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 이면에 있는 희생과 노력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스스로 성찰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대중은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대중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만이 엘리트가 될 수 있다. 그것이 투자에서든, 철학에서든, 혹은 삶의 태도에서든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생각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책은 출간됐을 당시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사람들의 소통이 용이해지고, 산업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인구의 집중은 대중이라는 새로운 집단을 만들어 냈다.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이제 막 발돋움 하려는 대중을 대상으로 날 선 비판을 했으니 반향이 얼마나 거셌을지 알만하다.
책이 출간된 지 1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많은 반성을 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경고는 2차 세계대전과 냉전, 그리고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는 제노사이드를 통해서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가 대중의 출현 원인을 산업과 교통 그리고 통신의 발달, 여기에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현대에는 그가 살던 시대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감정을 공유하고 살아간다. 그만큼 당시보다 더 많은 사회적 정체성을 느끼며 집단을 이룬다.
21세기를 누가 개인주의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육체적으로는 타인과 마주하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그 어떤 시대보다 많은 사람들과 사회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집단화되고 있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인종 등등 하나하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분야에서 집단화는 이뤄지고 있다. 집단화가 꼭 나쁜 영향만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나쁜 영향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
sns는 이런 인간의 특성을 잘 파고들었고, 어떤 것이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이게 하고 오래 머무를 수 있는지 파악했다. 정답은 사회적 정체성을 이용한 집단화였다.
사회적 정체성이 강할수록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것은 자신을 거부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집단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집단이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집단에서 쫓겨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리스크가 된다. 현대의 사람들은 집단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더욱 집단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현대인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아도 인터넷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사회적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고, 집단을 만들 수 있다. 집단이란 얼마나 많은 정보가 주어지는지 여부에 따라 아주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SNS는 집단화라는 특성을 잘 이용하는 사람에게 경제적 보상을 준다. 그러자 선동꾼과 거짓정보, 그리고 혐오와 분노 그리고 갈등을 유발하는 콘텐츠가 넘쳐났다.
선동, 혐오, 분노, 갈등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문제가 되고, 대중은 전체를 보지 않고 아주 사소하고 표면적인 문제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대중이 반드시 실패하는 존재, 혹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대중을 낮잡아 보기 때문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말로 대신 설명하겠다.
"내가 지금까지 쉬지 않고 노력해 온 목적은 사람의 행동을 조롱하기 위해서도, 통탄하기 위해서도, 모욕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바로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스피노자-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나는 군집투자를 하는 사람들을 조롱할 이유도, 통탄할 이유도, 설득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얻고자 할 뿐이다.
여러 차례 밝혔지만 내가 전업투자자로서 주력으로 하고 있는 투자는 행동경제학을 기반으로 한 투자다. 홍대병이나, 반골의 기질이 있어서 다수의 대중이 선택하는 주식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비싸고,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주식은 싸기 때문이다.
물론 주가가 낮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 나는 그 간극을 찾아서 이익을 내고자 투자자의 행동분석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https://brunch.co.kr/@2fab0ada6d0c424/19
이 편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다른 투자자를 조롱하는 것을 싫어한다.
과학적 사고에 의하면 세상에는 확실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측이 불가능한 투자시장에서 확실한 진리가 존재할 가능성은 더 낮다.
지금의 실패가 앞으로의 실패를 보장하지 않고, 지금의 성공이 지속적인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다. 지금 실패한 투자자를 조롱하는 것은 추후에 내가 실패했을 때 조롱을 받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차라리 나는 실패한 투자자를 분석하는 것을 선택했고, 투자시장에서 다수 투자자의 움직임을 분석하기 위해 대중을 공부한다. 그것이 나의 실패를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내가 얻은 결론은 투자시장에서 적게 벌더라도 적게 실패하는 방법은 대중을 배신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 대중은 일부 전문가의 선동에 취약하다. 이는 곧 대중에 의한 극단적 군집투자가 벌어질 위험이 있다. 집단은 스스로를 모방하고, 모방은 증폭되는 성향이 있기에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해갈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형성된 군집투자는 높은 수익률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높은 수익률을 포기하는 대신 덜 잃는 방식을 선택했다.
군집투자의 특징은 눈에 띄는 정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즉 접근하기 쉬운 정보를 바탕으로 시작되는데, 이 정보는 집단의 특성인 모방과 증폭에 의해서 과잉확신을 일으킨다.
집단에서 과잉확신이 시작되면 곧 확증편향의 형태가 나타난다. 객관적 정보보다 주관적인 정보에 의존하며, 과잉확신이 불러일으킨 확증편향이 다시 과잉확신으로 이어지는 악의 순환고리를 형성하며 문제가 커진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정의한 엘리트는 자기 성찰과 도덕적 책임감, 그리고 문명의 발전을 이어가는 사람이다. 내가 투자자로서 그가 말하는 엘리트에 근접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어려운 길이고, 소수만이 얻을 수 있는 지위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나는 투자자로서 엘리트는 될 수 없어도, 그가 말한 대중의 문제점과 약점을 보완하고자 한다. 대중을 거스르는 것이 투자에서 반드시 이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많은 수익을 눈앞에서 놓칠 수 있을지라도, 대중을 배신하는 투자를 이어가고자 한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투자에 접목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 다섯 가지다.
1. 주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2. 표면적인 것보다 전체를 바라보고, 원리를 이해하기.
3. 행태적 편의에 취하지 않기.
4. 사회적 정체성에 의해 감정적 상태에 빠지지 않기.
5. 사회적 정체성을 이용하지 않기.
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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