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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랭이 Jul 10. 2023

10여 년 8평 컨테이너 생활에 마침표를 찍다.

엄마, 우리 이제 어디 가서 살아?

때는 여름, 집주인의 통보가 날아왔다.


'미안한데... 집을 좀 빼줘야겠어'


그렇다. 8평 남짓 되는 컨테이너에도 집주인은 있었다.


14년 전, 어렵게 마련한 집을 처분해 빚을 갚고 그래도 남은 빚이 많아

아빠와 엄마, 여동생까지 우리 네 식구는 맞은편 컨테이너로 이사를 와야 했다.


집을 팔고 남은 돈이 얼마 없고 대출도 되지 않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이사 간다고 좋아하며 따라왔고 주택이라 더 신기해했었다.

화장실이 건물 안에 있고, 내 방도 있으니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생이던 여동생의 방은 따로 없었고,

방이 좁아 아버지는 거실에서 생활했고,


내 방은 보일러가 아예 없었고,

에어컨은 더더욱 없었으며,


여름엔 더워서 밖으로 나가고

겨울엔 추워서 밖으로 나가는 생활이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겨울에 이사를 갔는데, 전기장판도 보일러도 아무것도 없어

밤에 옷을 껴입고 잤다.


양말 세 켤레에 속옷 + 내복 + 운동복바지 + 교복 + 점퍼 + 운동점퍼 + 이불 세 겹을 준비해 항상 잠에 들었다. 얼굴 부분은 추워도 잠드는 대는 지장이 없으니 그렇게 살았다.


엄마와 여동생은 보일러는 들어오지만 책상 하나 못 놓는 비좁은 방에서 구겨져 자야 했고, 아침마다


"꺄아~~~~~~악" 바퀴벌레나 지네 따위를 발견해 소리를 지르는 여동생의 비명을 들어야 했다.


집 주변으로 10년 가까이 공사를 헤대는 통에 공사장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음과 분진, 소란과 싸움을 온전히 받아내고 있었다.

트레일러가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해 내가 수기를 봐주기도 했으니 말 그대로 공사판이었다.


컨테이너 중에서도 주택용도로는 절대 쓰지 않는다는 재질이라 단열, 방음 따위는 되지 않았다.


보슬비라도 내리면 1m 거리에 있는 가족들과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될 정도였다. 지금은 사라진 '가족오락관'의 '고요 속의 외침'과 다를 바 없었다.

아마 부엌에서 "밥! 먹! 게! 상! 좀! 펴!"라고 말하면

'닭, 멍게 사줘 봐(???)'로 들릴 것이다.


밤에 비라도 내릴라 치면 귀마개를 하고 자야 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요즘은 ASMR이니 뭐니 해서 유튜브를 듣고 자겠지만, 난 ASMR이 정말이지 관심도 없었다. 5.1 채널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귀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에 잠이 깰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엄마의 한숨소리가 들려 거실에 나가보니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을 발견했다.

내가 군에 있을 때도 무너졌었는데 두 번째란다.

그러고 보니 그 부분만 벽지가 없는 천장이었다.


속이 텅텅 빈 천장을 바라보며 같이 한숨을 쉬었고,

발목까지 차오른 물을 퍼 내보낸 뒤 물기를 닦을 만한 것을 찾아 닦고, 거실의 물건들을 밖으로 다 들어내어

말려야 했다.


열대야가 시작되면 선풍기를 몇 대를 돌려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30도는 우습게 넘기는 방 안에서 선풍기를 돌리고 누우면 땀에 젖은 몸에 헤어드라이기로 온풍을 쐬는 기분이었다.


참다못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여동생과 엄마는 근처에 있는 찜질방에 거나 친구집에서 자기도 했다.


낮에는 너무 더워 방 안에 있으면 화상을 입을 것 같았고, 열기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그늘에 가 있으면 오히려 시원했다.


마치 비닐하우스에서 익어가는 딸기 같았다.

딸기는 붉고 달콤하기라도 하지 내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렇듯 다양한 추억이 깃든 집인데...


나.. 가.. 라.. 니...


갑자기..  어떻게 집을 구한단 말인가...


그리고 난 지금 수험생이라고...!!!  하늘을 원망했다.


답안지교체로 첫 시험 낙방 이후 두 번째 수험생활 위기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 은행과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들락날락했다. 처음 이런 일을 해보는 지라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떨렸다.


특히 공인중개사사무소에서 "얼마짜리 알아보세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돈이 아예 없었으니 말이다.


은행에 가서 이것저것 알아보니 대출도 얼마 나오지 않았다. 지금이야 디딤돌이나 보금자리니 이런 걸 알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경제바보 였다.


그러니 은행에 가면 보금자리론과 같은 대출 상품은 안내를 받지 못했다. 내가 알아야 물어보고 물어봐야 대답을 해주는 것 같았다.


무직인 내 앞으로도 대출이 나올 리가 없었다.



엄마와 난 절망했지만 희망을 놓지는 않았다.


"엄마 미안해.. 이번에 시험만 됐어도.."


"아니야 아들.. 내가 미안하지.. 한 번 더 알아보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며칠 뒤 일을 하고 있던 내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엄마였다.


들뜬 목소리로 엄마는 "아들, 집 구했다. 한 번 볼래?"라고 내게 말했다.


전에 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월세가 하나 나왔다.  3개였다.


들어가서 보니 동생 방으로 쓰면 딱 좋을 것 같은 큰 방이 하나 보였다. 그 자리에서 오케이 했다.


여동생도 같이 보러 왔는데, 자기는 어디 방을 쓰면 되는지 물어보았다. 난 숨도 쉬지 않고 답했다.


'큰 방'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14년이다...

14년 동안 자기 방도 없이 지내온 여동생에게 이제라도 큰 방하나 내어주고 싶었다.


내 방은 싱글침대 하나 놓으면 서 있을 자리 하나 겨우 있는 창고 같은 방이었는데, 수험생이라 도서관에서 거의 살고, 지금은 대리운전 하느라 잠만 자니 큰 방은 필요 없었다.




집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랬나 보다 싶었다.


한 순간에 가정경제가 무너져 돈을 너무 겁내고 있었던 터라 움직이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일이라도 없었으면 이유도 모른 채 계속 그곳에서 살았을 텐데 이사할 용기가 생긴 것이다.


또 내가 아직 공부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을 때, 첫 시험에 떨어지고 잠시 일을 하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겨 공부에도 큰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너무도 감사할 것이 많았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다음 시험에는 반드시 합격해

아빠, 엄마를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동기도 강하게 생겼다.


세상의 모든 기운이 내가 반드시 합격할 수 있게 흘러가 주는 것 같았다.


합격을 반드시 할 거라는 상상을 계속하니,

고독한 항해 중에 수평선 위로 조그마한 합격섬이 보였고,

지금 내 주변으로 일어나는 곁가지 같은 이벤트들은 그저 항해 중 만나는 작은 파도에 불과했다.

시선은 합격지점에 있고, 노는 계속 젓고 있으므로 배만 가라앉지 않는다면 반드시 상륙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있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엄마와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맛대니 엄마와 더욱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리막길을 고 있을 때는 그것이 정말 내리막길인 줄 알지만,

지나고 돌아보 그것은 우상향을 위한 하나의 도약 과정임을 깨닫는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겪었던 것들을 저의 방식대로 써봅니다. 때론 웃기도, 때론 울기도 했던 지난 시간.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분명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은 수험생, 직장인, 아빠, 엄마 그 누구라도 잠시나마 위로가 되시기를 바라며 계속해서 써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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