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공무원이 되기 위한 수험생활 ①
12월 31일부로 나의 전업이었던 통신사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민은 깊었지만 귀향까지의 과정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짐은 가벼웠고, 인사는 간단했다. 나는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 반드시... 반드시 소방관이 되어 다른 삶을 살아낼 테야!'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우려 속에서도 한 분만큼은 내심 응원의 눈빛을 보내왔다. 바로 아버지였다. 옆에 있던 어머니도 마찬가지.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 왔는지는 정확히 말씀드리지 않아 잘 모르지만 통신사 일도 나름 응원을 해주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님이 그러하듯이 나의 부모님도 안정된 직장을 구해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셨다.
옥신각신, 티격태격하던 모습은 세월과 함께 누그러지고, 대신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몇 년 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가끔 공부하러 내려온 아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시며 최대한 나의 스케줄을 맞춰 주시려고 하는 부모님을 보며, 힘든 수험생활도 곧잘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공부가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남들은 쉽게 할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공부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시 시작된 호흡곤란 증상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1분을 바로 앉아 있지를 못했다. 뒤에서 누군가 본다면 혼자 뭐 하나 싶을 정도로, 계속해서 꿈틀 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앞으로 시험까지 석 달도 남지 않았는데, 몸을 쉬게 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매캐한 땀냄새와 누군가들의 발냄새, 그리고 아직 몸에 배어있는 담배냄새까지, 도서관 열람실을 가득 메운 공기는 내겐 턱 끝까지 차오른 수족관 속 물과도 같았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공황장애와는 또 다른 증상이었다.
정말 다행인 건, 정말이지 다행인 것은 이번엔 호흡이 정상인 상태와 비정상일 때를 어느 정도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번 시험에 반드시 붙어야겠다는 그 간절함이 나의 오감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우선 기상 후부터 점심을 먹기 한 시간 전까지는 호흡이 꽤 정상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특히 점심을 먹은 후부터는 숨을 제멋대로 몰아 쉬었다. 오후를 그렇게 보내고 나면 저녁때까지 호흡곤란이 이어지는데, 점심을 과하지 않게 먹고, 전 날 잠을 푹 잔 상태면 저녁때 조금 호전되었다. 마지막으로, 공부를 하지 않고 쉬고 있을 때는 대체로 나은 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서관 열람실이 아닌 열린 공간 즉, 공원이나 벤치에 있을 때는 호전되는 편이었다.
나의 호흡곤란 증세는
1. 잠에 영향을 받는다. 2. 식사량에 영향을 받는다. 3. 사람이 많은 공간에 있을 때 영향을 받는다.
분석은 끝났지만 이대로 더 이상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나를 고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우선 변수를 하나씩 고쳐 나갔다.
잠을 푹 자지 못할 경우 다음날 혹은 그다음 날부터 호흡곤란 증세가 시작된다. 따라서 늦어도 밤 11시 이전에는 잠을 청하려고 노력했다. 열람실은 밤 10시까지 하기 때문에 9시 30분 정도에 마무리하기 시작해서 10시 조금 넘게 집에 가 씻고 잠이 들면 되었다. 물론 지키지 못할 때도 가끔 있었지만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했다. 몇 년 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잠을 많이 자지 못하면 몸이 피곤해지고, 피곤하면 스트레스가 누적되 호흡곤란으로 바로 나 현재도 계속 관리 중이다.
두번째로 식사였다. 식사와 영양에 대해서 당시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공부하니까 잘 먹어야지'가 내 기준이라면 기준이었는데, 사실 '잘 먹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빚을 갚느라 통장잔고는 바닥이 나 있는 상태였고, 시간이 충분치 못 해 집에 가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불안은 스트레스와 관련되어 있다. 잘 알겠지만 스트레스라는 것은 꼭 어떤 충격적인 일을 겪거나 큰 사고를 겪어서만이 오는 것이 아니다. 적당량의 식사를 하지 않고, 지나치게 많은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해서 식사량을 최대한 조절하려고 애썼다. 점심시간이 되면 집에서 싸 온 식빵 한 조각을 흰 우유에 적셔 목구멍으로 집어넣었다. 가끔 밥도 먹었지만 생각보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했다. 하루 생활비가 4만 원도 안 되는 탓에 어쩌다 한 번씩 밥을 사 먹을 수 있었다. 기사식당이 근처 있어 밥이 당길 때 최대한 활용했다. 부모님께 돈을 받아 점심을 맛있게 먹거나, 집에서 도시락을 싸 올 수도 있겠지만, 그럴 시간도 여유도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부모님께 손을 빌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또다시 '아카찬(아빠카드찬스)'이 되기는 싫었다.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서 느끼는 공포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집에서 공부할 환경은 안 되고, 무엇보다 집에 가면 의지 약한 나는 바로 퍼지고 말 것이었다. 이 부분은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 없는 부분이라 안고 가야 했다. 다른 변수를 아무리 통제해도 이 부분이 통제되지 않으니 호흡곤란 증세의 호전은 아주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른 보이지 않는 변수를 줄이고자 애를 썼다.
생각해 보았다. 또 무엇이 있을까... '담배...?' 지금의 호흡곤란과 담배과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금연을 해서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사실 담배를 사서 피울 형편도 이제 안 되었다. 한 갑에 4,500원씩 하는 담배를 8갑만 아껴도 한 달 생활비가 나왔다. 돈을 아끼면 돈이 없어 쫓기는 공포도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금연은 앞으로 내 인생의 '도전과 변화'의 상징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렇게 다짐한 후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금연에 성공한 후에도 드라마틱한 호흡곤란 증세의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금연은 내게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끈기도 생겼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지 않아도 되니 책상머리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다. 공부시간이 자연스럽게 확보되었고 확실히 이전보다는 나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은 분명했다.
공용공간에 있을 때 밀려오는 공포와 호흡곤란은 조절하기 쉽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니 방법이 조금 보였다. 오전에 최대한 공부를 집중해서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산책을 하며 공부했던 것을 곱씹는 것에 투자했다. 왜냐하면 점심시간 이후에 호흡곤란이 극심해지기 때문이었다. 저녁에는 호흡이 조금 불편해도 조금만 있으면 퇴근(?)이니 버티는 방식으로 스케줄을 맞춰갔다.
책과 영상 속 강사를 번갈아 가며 하루종일 보다가 목이 뻐근하면 가끔 고개를 들어 스트레칭을 한다. 빛 하나 반사되지 않는 먹먹한 책상의 한 쪽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한쪽 벽을 통해서는 나의 어두운 과거가 보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의 밝은 미래가 보인다. 더 나빠질 것도 없는 나의 미래를 기대하며 그 위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은 영상 속 강사도, 취업에 성공한 친구도, 집에 계시는 부모님도, 그 누구도 아니다. 내 인생의 향방을 그려나가는 것은 바로 '나'이다.
나를 알아가는 일을 멈추지 말자. 소홀히 하지 말자. 내면과 외면, 심연과 표면이 가까워질 때 '나'는 '나'의 문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