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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붉은 눈 03화

3화.

by 여름의푸른색




창밖으로 펼쳐진 논과 밭. 제주의 중산간에 있는 이곳은 육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동네이다. 이곳 사람들은 해안가보다 습도가 낮아 제주 생활에 적응하기 수월하다고 했다. 눈앞에는 함덕 바다가 펼쳐지고 날씨가 맑을 땐 저 멀리에 있는 섬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이 정류장에는 한 시간에 한 번쯤 버스가 온다.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는 편의점과 치킨 가게가 있다. 마을 초입에는 수국이 길게 늘어서 있고 까만 돌담이 수국과 나란히 키를 맞추고 있다. 수국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타운하우스가 있다. 이곳이 우리가 사는 공간이다. 고요한 시골마을에서는 누구 하나 죽어나가도 아무도 모를 까만 정적이 깔려있다. 우리 집 안방과 똑같이.

남편과의 대화가 사라진 지 14년. 남편은 더 이상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꼭 필요한 이야기만 전달하고 대답은 단답형으로 끝난다. 벽과 사는 기분.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없다는 게 시리도록 아프게 느껴졌다. 나에게만 들리고 나에게만 일어나는 기묘한 일들도 철저히 나 혼자만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가 편했다. 남편이 집 밖으로 나가고 집안에 홀로 있을 때, 나는 평온함을 느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허울뿐이었다. 누구를 위해서 나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는 걸까. 나를 위해서? 아니면 타인의 시선 때문에? 아니면 외로움 때문에? 여전히 껍데기만 안고 사는 기분, 차라리 결혼이란 걸 하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결혼 이후의 생활은 내 인생의 가장 커다란 도박임이 분명했다. 함부로 걸어서는 안 되는 내 삶을 건 도박.



“여보, 약은?”



내가 남편과 멀어지게 된 그날. 남편은 약 먹었냐는 말 한마디로 나를 죽여버렸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느끼고 보는 것에 스스로도 공포스러웠던 때였다. 남편 말대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 어쩌지? 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죄책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생각은 곧 현실처럼 느껴지고 내 몸은 그 생각을 먹으며 사실처럼 받아들였다.


두통과 환청 심장을 조여오는 통증과 식은땀. 숨을 쉴 수 없어 주저앉기를 여러 번. 나는 약을 먹기 시작했다. 약을 먹으면 나는 차분해졌다. 예민했던 마음들도 평화로워졌다. 화가 나지 않았고 웃을 수 있었다. 이것이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약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소파 위에 누워있었다. 담요도 머리까지 덮여있었다. 나는 안방에서 어떻게 소파로 걸어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한쪽 눈언저리가 뻐근하게 느껴졌다.



‘꿈을 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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