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회사에서 상사가 내 의자를 발로 찼다
엄마 목소리가 가끔, 나를 대신해 숨을 쉰다.
"꽃처럼 살아라. 사람들이 다들 예뻐하고 사랑하는, 그런 꽃처럼."
스물세 살, 대학 졸업식 날 엄마가 해준 말이었다. 그때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그렇게 살게요. 꽃처럼 예쁘게, 사랑받으면서.”
그로부터 15년.
나는 꽃이 되지 못했다. 매일 아침 경기도 외곽의 신축 아파트에서 눈을 뜨고,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출근하고,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야 다시 그 아파트로 돌아온다.
경기도 자가. 대출이자 알림이 매달 종교처럼 도착하는 나의 집. 중소기업 직장인, 김지혜 차장인 나의 유일한 훈장이자 가장 무거운 족쇄이기도 하다. 현관문을 열면 은은한 디퓨저 향기가 나를 맞이한다. 7평 남짓한 오피스텔을 전전하던 시절을 지나, 남편과 함께 대출을 영끌해 마련한 이 집은 내 자존심의 마지막 보루다.
현관문을 열면 남편 성준이 소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는 각자의 하루가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를 서로에게 토해낸다.
그게 우리 부부의 일상이다.
오늘도 똑같은 하루였다. 아니, 조금 더 나빴다.
오후 3시쯤이었다.
모니터를 너무 오래 봤는지 눈이 뻑뻑해졌다. 몇 달 전부터 생긴 안구건조증 때문에 인공눈물을 수시로 넣어야 했다.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을 열어 눈물 박스를 집으려는 순간.
'툭.'
의자가 흔들렸다.
"맛있는 거 혼자 먹지?"
S전무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뒤에 와 있었다. 서랍 한쪽에 있는 초콜릿과 사탕이 든 지퍼백을 본 모양이었다.
'툭.'
또 한 번. 의자를 발로 찼다.
"농담이에요."
마스크 안에서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의자를 발로 차다니.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를.
S전무는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고 했다. S전무의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제가 oo에서 20년 넘게 근무해 봐서 아는데”
라는 문장이 접두어처럼 붙었다.
어디 출신인지와 상관없이, 사람의 진짜 모습은 평소에 별생각 없이 내뱉는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존댓말을 쓰며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직원의 의자를 발로 차는 사람. 그게 S전무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이미 찍힌 몸이다.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전무님."
"예?"
"지금 제 의자, 발로 차신 거 맞죠?"
S전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주변 직원들의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팀장이 당황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아, 전무님 저 잠깐 드릴 말씀이…"
S전무는 대답 없이 돌아섰다. 팀장을 따라 회의실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분노 때문인지, 모욕감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방금 한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인공눈물을 넣으려다 말았다. 어차피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았으니까.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엄마 생각이 났다.
작년 겨울이었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버스 정류장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중년 여성을 봤다. 손에 목도리를 들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건 지쳐 보이는 젊은 여자. 사회 초년생쯤 되어 보였다. 아주머니는 그 앞까지 뛰어가더니 얼른 목도리를 둘러주고 가방을 받아 들었다.
딸이었나 보다.
추운 날씨가 걱정되어 한달음에 달려온 엄마. 급히 나오느라 맨 발목에 신발을 신은 엄마.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딸의 가방을 받아 드는 엄마.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한참을 서 있었다. 집에 가는 것도 잊은 채. 엄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났다.
저 딸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다. 나도 그렇다. 우리 엄마의 귀한 자식이다.
그런 귀한 자식이 회사에서 의자를 발로 차이고 있다는 걸 엄마가 알면, 우리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까.
집에 도착하니 8시가 넘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저녁밥 냄새가 났다. 성준이 간단하게 차려놓은 모양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성준이 나를 보고 일어났다.
"왔어?"
"응."
"밥 차려놨어. 씻고 나와."
샤워를 하고 나오니 식탁에 된장찌개와 계란말이가 놓여 있었다. 성준은 맞은편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맥주를 하나 땄다.
"오늘 어땠어?"
"… 그냥."
"그냥이 아닌 얼굴인데."
밥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S전무가 내 의자 발로 찼어."
"뭐?"
"내가 앉아 있는데. 뒤에서 와서 발로 의자를 툭툭 찬 거야. 농담 이래."
성준이의 표정이 굳었다.
"미친 거 아냐? 그게 무슨…"
"나도 말했어. 지금 제 의자 발로 차신 거 맞냐고."
"그래서?"
"그냥 가버렸지. 아무 말 없이."
성준이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밥을 먹었다.
된장찌개가 입 안에서 풀어지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아까는 안 났던 눈물이 지금 나려고 했다. 집이니까. 성준이 앞이니까.
"지혜야."
"응."
"… 힘들지?"
"응."
성준이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이 사람이 없었으면 나는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성준 씨."
"응."
"우리… 안 낳는 쪽으로, 진짜 결정할까?"
성준의 손이 멈췄다.
"이 정글 같은 세상에, 내 아이를 초대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해 낸, 내 새끼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세상에 내놓지 않는 것’이라니. 지독한 모순이라 생각하며 나는 성준의 눈을 똑바로 봤다.
*인스타그램 카드 뉴스: @kimchajang.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