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게 어디야
설 연휴가 다가오고 있다.
올해 설은 연휴가 길다. 토요일부터 쉬기 시작해서 그다음 주 목요일까지가 휴일이었다. 그리고 금요일이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다.
대학 동기 단톡방에 카톡이 올라왔다.
'얘들아 나 이번 설에 가족들이랑 여행가~ 명절 잘 보내~'
민지였다. 또 민지.
'우리 회사 연차 쓰라고 권장해서 금요일 다 쉬어, 어차피 연차 낼 생각으로 여행 미리 예약하긴 했지만 ㅋㅋㅋ '
'부럽다ㅠㅠ 우린 금요일 출근이야'
'헐 진짜? 요즘도 그런 회사가 있어?'
있지. 여기.
나는 아무 말 없이 카톡을 닫았다. 악의는 없다. 그냥 해맑은 친구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해외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자유롭고 부족함이 없다. 대학 동기들 중에 취업도 가장 먼저 했고, 해외 생활을 할 때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는 명절마다 귀성전쟁 없이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다. 뭘 해도 잘 풀리는 사람.. 그런 친구였다.
며칠 후, 경영지원팀에서 메일이 왔다.
'설 명절 선물 안내의 건'
매년 오는 메일이었다. 내용도 매년 비슷했다.
'아래 품목 중 선택하여 회신 바랍니다.
1. 회사 제품 (자사 재고)
2. 참치 세트
3. 생활용품 세트'
첨부된 사진을 열어봤다. 작년이랑 똑같았다. 재작년이랑도 똑같았다.
회사 제품은 쓸 데가 없었다. 첫 해에 궁금함에 골랐다가 아직도 창고에 박혀 있다. 참치는 아직도 작년에 받은 게 남아 있고, 생활용품은 안 쓰게 된다. 부피와 무게가 좀 있어서 뭘 골라도 대중교통을 타고 들고 가기 힘들어서 한동안 책상 옆자리에 처박아두게 된다.
'참치 세트'에 체크하고 회신을 보냈다. 참치 세트는 그래도 당근에 올리면 가장 빨리, 잘 팔리는 품목인 것 같다.
옆 팀 막내가 지나가다 말했다.
"차장님, 올해도 똑같네요. 저 작년에 생활용품 세트 골랐는데 아직도 안 썼어요."
"그러게 매년 똑같네 ㅎㅎ. 들고 가기도 쉽지 않고."
"그러게요. 차 없으면 어떻게 가져가요 이걸. 우리도 차라리 상품권 같은 거 주지"
“3만 원짜리 상품권 줄 순 없잖아 ㅎㅎ”
막내가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점심시간, 명절 연휴 전에 같이 밥 먹고 커피나 한 잔 하자고 친한 여직원들 몇 명을 불렀다. 여직원들이 모이면 보통은 분식집으로 향했다. 여고생들처럼, 떡볶이, 순대, 제육볶음 등 여러 메뉴를 시키고 다 같이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경영지원팀의 혜원이 입을 열었다.
"차장님 그거 아세요? 저희 설 선물이요, 경비 아저씨랑 청소 아주머니들은 우리랑 다른 거 받는데요."
"뭘 받는데요?"
"직원들 것보다 더 싼 걸로 하라 그랬대요. 그래서 좀 더 작은 걸로 따로 샀대요."
나는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다 멈췄다. 회계팀의 세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진짜요? 왜?"
"몰라. 원래 그렇대. S전무님이 그렇게 하라 그랬다는데"
“와~ 진짜 대박”
혜원과 세정은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입맛이 뚝 떨어졌다.
“참… 몇 분이나 되신다고… 그걸 아껴…”
“그쵸 차장님? 진짜 진짜 너무해요”
평소에 하시는 일 말고도 경비 아저씨는 눈이 오면 말끔히 주차장 앞까지 열심히 치워 주셨고, 어떨 때는 옥상 잔디도 깎고 계셨다. 청소 아주머니들도 한여름에도 창문 하나 없어 푹푹 찌는 계단까지 매일 물청소를 하셨다. 지금 선물도 대단하게 비싸지 않을 텐데, 더 싼 걸로 준비를 한단다. 경비 아저씨는 회사로 배달 온 그 선물을 직원들에게 나눠주도록 분류 작업을 하실 텐데, 본인들 것만 다른 걸 보시면…
그나마 주는 게 어디냐라고 생각하며, 그마저도 감사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을 계급으로 나누듯,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번 놀랍다. 몇 번을 겪어도 그 충격은 언제나 새롭다.
맛있던 떡볶이에서는 밀가루 맛이 나는 것 같고, 제육덮밥에서는 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여전히 바쁘게 입을 움직이며 재잘거리는 어린 여직원들을 보았다. 회사에 좀 더 좋은 어른들이 있다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선물 수령일.
퇴근 시간을 앞두고 팀별로 1층 로비에 선물을 받으러 오라는 공지가 올라왔다. 팀장님과 둘밖에 없는지라 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경영지원팀 직원이 팀별로 인원 수와 선물 개수를 확인하고 경비 아저씨께서 수에 맞게 나눠주고 계셨다. 팀마다 한 두 명씩 내려와 선물들을 받아 갔다.
내 차례가 됐다. 참치 세트와 팀장님의 생활용품 세트를 받았다. 양손에 하나씩 들기도 무거운데, 다른 팀 직원들은 몇 개씩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조심해요 다치겠어요"
양팔로 세트 몇 개를 안듯이 들고 있는 옆 팀 직원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차장님!"
씩씩한 어린 직원들. 뒤이어 오는 직원들이 탈 수 있도록 문이 닫히지 않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감사합니다!"
사무실에 올라가 팀장님 자리 옆에 생활용품 세트를 두고 참치 세트도 책상 옆에 안 보이게 뒀다. 이걸 들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탈 자신이 없다. 일단 여기 두고, 나중에 성준에게 들르라고 할 참이다.
며칠 후, 성준이 오랜만에 야근 없이 정시 퇴근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퇴근하고 회사에 잠깐 들러 줄 수 있어? 설 선물 받은 거 실어가면 좋겠는데'
'응, 퇴근하고 바로 갈게'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막혀 7시가 되어서야 성준은 도착했다는 카톡을 보냈다. 실내화를 갈아 신고, 코트를 입고, 한 손엔 가방을, 한 손엔 참치 선물세트를 들고 내려왔다.
"트렁크 좀 열어 줘"
트렁크를 열고 참치 세트를 눕혀 실었다. 성준이 회사에서 받아온 듯한 백화점 쿠키 세트가 있었다. 성준의 회사도 매년 똑같은 선물이다.
"차 많이 막혔지?"
"퇴근 시간이라 어쩔 수 없지 뭐"
"올해도 참치 세트로 했어"
"참치 잘 먹지도 않으면서, 작년에 받은 것도 남지 않았어?"
“당근에 팔아 버리게.. 성준 씨네도 올해도 쿠키네?”
“우리도 매년 똑같아 ㅎㅎ”
“그래도 쿠키는 괜찮아, 나름 고급지잖아. 어른들도 좋아하시고”
“그렇긴 하지. 가다가 저녁 먹고 들어가자”
“거기, 백화점 지하 라멘집 어때?”
따뜻한 건 먹고 싶은데, 또 매일 먹는 밥은 당기지 않았다. 화려한 불빛의 백화점이 저 멀리 눈에 들어온다. 대기업에 다니는 민지는 올해 상품권을 받는다고 했다. 작년에는 한우 세트를 받았는데 불평하는 직원들이 있었다고 했다. 가볍고, 쓰기 편하고, 현금이나 다름없는 상품권.
작은 선물조차 안 나오는 곳도 있을 것이고, 명절 선물로 사과 두 개를 받았다는 기사도 본 듯하다. 받는 게 어디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명절 선물조차 대기업, 중소기업, 잘 나가는 회사, 그저 그런 회사로 나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다가 당근 앱에 들어갔다.
'참치 세트 새 상품 팝니다. 회사에서 받은 건데 안 먹어서요.'
'명절 선물 세트 미개봉. 직거래 원해요.'
'생활용품 세트 팔아요. 회사에서 받았는데 필요 없어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들 비슷한 처지였다.
스크롤을 내리다가 눈에 익은 박스가 보였다. 우리 회사 제품이었다.
'회사에서 명절 선물로 받은 건데 쓸 일이 없어서 팔아요.'
씁쓸해서 당근 앱에서 빠져나왔다.
인스타그램을 켰다. 피드를 내리는데 민지가 올린 사진이 보였다.
'#설선물 #회사복지 #여행준비 #상품권'
사진 속에는 백화점 신발 매장의 신기 편한 단화가 있었다. 댓글에는 '부럽다', '우리 회사도 저런 거 줬으면', ‘여행도 부럽고 상품권도 부러워’ 같은 말들이 달려 있었다.
나는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그냥 넘겼다.
성준이 옆에서 뒤척였다.
"안 자?"
"응. 그냥."
"뭐 봐?"
"인스타."
"…"
"민지가 상품권 받은 걸로 신발 샀다고 올렸더라. 설에 여행 간대”
"대기업은 다르네."
"응."
"경기 어려워서 명절 선물 못 주는 데도 많대"
성준이 말했다. 위로인지 체념인지 모를 말투였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샌드위치 근무일인 금요일도 출근이고, 선물은 매년 똑같고, 그마저도 경비 아저씨랑 청소 아주머니는 더 작고 저렴한 걸 주고…
이렇게 끝없이 비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도 없을 텐데, 찬바람이 쌩쌩 부는 회사 분위기 때문인지 점점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설 연휴가 코앞이었다. 주차장 같은 귀성 전쟁을 치르며 끝에서 끝에 있는 시댁에 갔다가 친정에 가야 한다. 시댁에 가면 또 물어보실 거다. 요즘 회사는 어떠냐고. 아기 소식은 있냐고. 그래도 시부모님은 명절 아침밥을 먹으면 설거지도 못 하게 하고, 먹을 걸 바리바리 챙겨 주시며 친정으로 가라고 하셨다. 여느 집처럼 남자들은 놀고 여자들만 내내 일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성준의 다정함은 부모님을 닮아 있었다. 손주 이야기만 아니면 크게 불편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어이 마흔 살로 접어들었고 아무도 모르지만 딩크족이 되기로 했다. 이 명절을 잘 보내면, 또 한동안은 잠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는 마냥 좋기만 했던 명절이, 나이가 들수록 부담이 되고 즐겁지 않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힘들고 먼 귀성길에 몸을 싣는다.
누구도, 힘들게 왜 굳이 가냐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은 채… 집으로 간다.
*인스타그램 카드 뉴스: @kimchajang.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