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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 Sep 30. 2023

로베르 캉팽의 창문들

플랑드르 르네상스의 풍경

 플랑드르 르네상스 화가라든지,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라든지 통상적으로 화가가 활동한 지역과 시기로 묶어서 작품들을 소개할 때가 많다. 이는 지역과 시기가 작품에 끼친 영향이 분명히 존재하고, 특히, 북구 르네상스, 바로코 시기의 많은 작가들이 스스로 자기 작품을 동시대의 중요한 사상적 통로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 역시 작품을 바라볼 때 이 구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몇 작품만 봐도 느껴지지만, 각 화가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이 너무나 다르고 독특한 나머지 이러한 구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지점도 역시 존재한다. 아니, 무색하다기보다 그 독특한 특성을 하나의 시기나 지역으로 묶기가 송구스러운 느낌이 든달까.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북구 르네상스, 바로크 회화라는 큰 범주에서 이들 회화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특성들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되, 각각의 회화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세밀하고 가끔은 복잡한 이야기들도 즐겁고 때로는 진지하게 관찰해 보았으면 좋겠다. 


Workshop of Robert Campin, Annunciation Triptych (Merode Altarpiece),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의 (혹은 그의 워크숍에서 제작되거나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들 역시 여성의 얼굴이라든지, 인물들의 자세, 실내 인테리어 표현 등에서 다른 그림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그림체를 가지고 있다. 로베르 캉팽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얀 반 에이크와 함께 15세기초의 네덜란드의 사실주의적인 회화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특히, 회화에 전통적인 종교관을 담으면서도 동시대의 주문자들이 성모 마리아나 아기 예수, 성인들이 실제로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던 소망들을 잘 표현했다.  <메로드 제단화>의 메인 패널 역시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이라고 말해주는 수태고지의 전통적인 장면이지만, 이 장면이 펼쳐지는 장소는 동시대 플랑드르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주문자인 오른쪽 패널에 보이는 부부가 자기 집안으로 들어가다가 수태고지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의 구석구석에는 그 시대의 가구들, 벽난로, 주전자, 꽃병 등이 보이고, 황금빛 광선을 타고 내려오는 아기예수와 그로 인해 꺼져 연기가 나고 있는 촛불 등이 보인다. 그림을 확대해서 천천히 보다 보면 이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 것이 바로 오른쪽 패널의 창문, 정확히 말하면 그 창문 너머의 풍경이다.    


 오른쪽 패널에는 목수였던 성 요셉이 판자에 구멍을 뚫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요셉 뒤편에는 창문이 하나 있고 쥐 덫 하나가 놓여있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를 악마를 잡는 덫으로 치환한 성 어거스틴의 글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쥐 덫 너머 창문 밖 세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있다. 전체 그림에서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 작은 세계 안에 당대의 건축적인 요소와 15명이나 되는 인물들의 세부묘사가 참으로 정교하게 담겨있다. 플랑드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좁은 폭의 건축물들과 십자가가 달린 중세 시대 양식의 첨탑이 있는 두 개의 교회가 보인다. 그리고 이 건물들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옷, 모자, 신발들도 식별이 가능한 정도이다.


Robert Campin or one of his followers, The Virgin and Child before a Firescreen, 1440


 이어서 <화열 가리개 앞의 성모자>를 살펴보자. 이 회화에서도 성모자가 평범한 엄마와 아이처럼 어느 한 가정집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 뒤에는 역시 창문이 열려 있고 그 너머로 또 한 번 1440년대의 거리 풍경이 상세하게 펼쳐진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높은 첨탑의 교회와 교회를 둘러싼 건물들이 보이고 그 뒤로는 산 자락이 펼쳐진다. 전경에는 건물들 앞에서 지붕을 수리하고 있는 사람과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는 사람,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건물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Robert Campin, Saint Barbara, 1438

 <성녀 바바라>에서는 또 다른 관점의 창문 밖 풍경이 등장한다. 아버지에 의해 탑에 갇히고 개종으로 인하여 참수당한 성녀 바바라는 순교자로서 회화에서 전통적으로 탑과 함께 표현된다. 많은 화가들이 바바라의 배경에 탑을 위치시키거나 그녀가 직접 작은 탑을 들고 있는 전설적인 모습 그대로를 그렸다. 그러나 이 회화에서는 창문 밖 풍경의 탑으로 그녀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평범한 여인이 일반 가정집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창문 밖 풍경에서 탑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의 정체성이 확인되는 것이다. 


 

 창문들은 그림 속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그러나 내부에서 외부를 보여주고, 이어주며, 연결하는 이 창문이라는 수단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을 동시대적이면서도 창조적으로 탐구한 화가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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