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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Jul 26. 2024

자연스럽다

노인과 바다_어니스트 헤밍웨이

집의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보다가 선물 받았던 책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노인과 바다' 책이다. 분명 어렸을 때 한 번쯤은 이 책의 내용을 다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위대한 책들 중 하나임도 알고 있다. 그런데 "제대로 읽어본 적이 있나?"하고 질문했을 때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도록 다짐했다.


노인과 바다

모두가 알다시피 한 노인이 나온다. 바다도 나온다. 노인이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보내고 있는 시간이 85일이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날따라 바다 멀리 나가게 되었고, 듣도 보도 못한 크기의 청새치를 낚게 된다. 완전히 사냥하기까지 이틀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온 힘을 다해 잡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많은 상어들을 만나 싸워서 이기지만 청새치는 머리와 큰 가시들만 남은 채 육지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런 꾸며 낸 말을 날마다 되풀이했다. 노란 쌀밥도 생선도 있을 리 없었고, 이 또한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p.17)"


노인과 바다에 대한 해석은 무지하게 많다. 나도 안다. 그래서 색다른 관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20대의 내가 읽은 어떤 감상평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흐름을 따라 읽다가 이 이야기가 혹시 노인의 혹은 다른 이의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노인의 노쇠함을 보여주는 서술을 하다가 소년의 젊음을 이어서 다루다 보니 대비에서 오는 노인의 모습이 극대화되어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노인이 꾸며낸 말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다에 나가서 있었던 일들도 꿈이 아닐까 하는 사고까지 나아갔다. 책을 읽던 중에는 생각의 변화가 있었지만 청새치를 잡기 전까지만 해도 꿈인 줄 알았다. 


노인은 소득이 없었던 84일간의 시간 이후 85일째 되는 날에 엄청 큰 청새치를 낚게 되는데, 바다로 나가기 전 자신의 행운의 숫자는 85라고 한다. 어째서 85라는 숫자가 자신의 행운의 숫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청새치가 미끼를 문 날이 85일이 되던 날인 것은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엉뚱하게도 만약 노인의 행운의 숫자가 3이었다면 삼일 만에 잡았을지도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내가 생각하는 바다는 어떤 존재일까. 노인은 바다를 여자인 것처럼 불렀다. 젊은 어부들 몇몇은 남성형으로 불렀다.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한 노인은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어떤 것이라 했다. 남성으로 여긴 그들은 적대자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노인은 달이 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바다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다 보면 여자와 남자, 달과 해, 별이 생각보다 자주 등장한다. 


"날마다 사람이 달을 죽이려 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아마 달은 달아나버리고 말 거야. 하지만 인간이 날마다 해를 죽이려 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 우리는 운 좋게 태어난 것이야,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해나 달이나 별을 죽이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건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야. 바닷가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진정한 형제들을 죽이는 것만으로 충분해.(p.77)"


자연물은 인간의 친구일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인간이 자연물의 친구일지도 모르겠지만. 후자의 말이 더 자연스러운 듯하다. 광활한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자는 그들을 둘러싼 자연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자연물이 인간의 친구가 되어준다는 것보다 인간이 자연물의 친구로서 존재하고 있음이 보다 자연스럽다.


청새치에게 끌려가는 노인은 자신에게 잡힌 청새치가 여간 똑똑한 녀석이면서 꼭 사내답게 행동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불쌍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여성을 의미하는 바닷속에 있는 사내다운 청새치를 잡으려고 하는 노인은 마땅한 행위를 하고 있을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나와 형제인 게 세 가지가 있지. 고기하고 내 두 손.(p.65)"


노인은 바다에서 물속에 있는 고기들을 보며 자신의 형제들이라 칭한다. 그런데 청새치를 가지고 돌아가는 길에서 자신의 형제를 뜯어먹으려 하는 또 다른 바닷속의 형제들은 감정이 빠진 상태로 죽이게 되는 장면이 나타난다. 오히려 당연한 것인가? 자신의 강인한 생명력을 담고 있으며 자신과 동일시 여길 만큼 의미가 있던 청새치를 공격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노인의 머리는 맑을 대로 맑아졌고 단호한 결의로 흘러넘쳤지만 희망은 별로 없었다. 좋은 일이란 오래가지 않는 법이거든.(p.102)"


하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죄악이며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상어를 죽이면서 그 녀석을 죽인 건 정당방위였다고 말한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것들을 죽이고 있다며 자연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맞다. 그건 자연의 흐름이고 거스르기 어려운 일이다. 또한 거슬러도 괜찮은지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노인은 이때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때 글을 읽는 나는 이게 현실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거대한 바다, 그곳에는 우리의 친구도 있고 적도 있지.(p.121)"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p.121)"


위의 구절은 허무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안에 정말 작은 희망이 놓여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느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죄악이든 아니든 어리석은 일임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멀리 나갔을 때는, 너무 힘들게 할 때는 다시 돌아오면 된다. 자신이 가는 어느 곳이든 친구도 있고 적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괜찮다. 그게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일 테니까. 자연에 수긍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심지어 마지막 부분에는 관광객들이 놀러 와 청새치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웨이터는 어물쩍 상어라 답한다. 그렇게 엄청 큰 청새치는 상어로 오해받는다. 그러나 그게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든 굴러가는 세상 속에서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다. 사자 부분이다. 어떤 것을 의미하고 말하고자 하는지를 모르겠다. 후에 다시 읽으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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