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잘 하고 있어. 그런데, 네가 내 후임이 되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해. 아니다. 됐다”
“…”
본부장과 팀장들의 회식 자리에서, 팀장인 나에게 그가 술김에 내뱉은 말이다. 툭.
그리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가볍게 던진 그 한마디가 내 머릿속을 두드린다. 또독또독.
그때,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 지 묻지 않았다.
자격지심 이었을까. 육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분명했다.
10년 넘게 함께 일해온 그는 일과 효율을 엄격히 따지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육아와 가정일로 갑작스러운 휴가 요청에도 늘 흔쾌히 답한다. 평소에도 해야 할 일들을 잘 챙기니 알아서 사용하라고.
하지만 속으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역시, 아이가 있는 직원은, 편히 일 시키기가 힘들어’
괜찮다.
여덟 살 쌍둥이 엄마이고, 맞벌이 와이프이자,
규모가 꽤 큰 회사의 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적당히, 괜찮게 근무할 수 있는 이 곳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이직한 선배들이나 헤드헌터로부터 팀장직을 제안 받은 적이 꽤 있었다.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물어본다. 경력도 많고 집도 먼데 왜 이직하지 않냐고.
그들에게 속으로만 나직하게 외친다. 이직하면 적응을 위해 반년은 야근을 해야 할 것이며, 경력으로 입사한 팀장은 성과를 내기 위해 일에 올인해야 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들을 하고 싶지만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진심을 조용히 구석에 숨기고, 예쁘게 포장하여 답한다.
이곳에서 더 할 것이 많고, 배우고 쌓아온 것들을 이 회사에 기여하고 싶다고.
진심 반, 거짓 반이다.
일과 가정을 동시에 잘 꾸려나갈 자신이 없었다. 한동안은 커리어도 쌓고 연봉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하는 처지가 안타까웠다. 속상했다.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 하고, 지금에 안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 번의 고민과 포기의 반복 끝에, 지금은 이곳에서 일과 가정을 적절하게, 솔직하게는 편히 일하는 것이 영리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힌 상태다.
그렇게 회사와 나의 적절한 협상 1차전이 끝났다.
지금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만의 루틴을 만들었다.
반복적인 일상을 수행하며 보람으로 충만한 하루 하루를 채워가고 있는 중이다.
새벽 다섯 시 반 알람이 울린다.
출근 준비를 하며, 독서대에 놓인 책을 읽는다. 하루에 두 장 정도 된다. 한 달이면 책 한 권이다.
한 시간여의 출근 길, 오디오 북을 듣는다. 자기개발서나 육아서적 같은 것들이다. 유익한 글들을 들으면 하루의 시작이 꽤 품위 있어 진다.
아침 7시 출근하면 혼자다. 고요한 공간에서 감사일기를 쓴다. 마음이 정갈해 진다.
플래너에 오늘의 할일 들을 나열한다. 회사 일 뿐만이 아니라, 아이들 학원 등록, 책이나 생필품 등의 쇼핑 목록도 포함된다. 언제 할 것인지도 세세하게 계획한다.
자, 이제 머릿속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둘 차례다.
각 방에는 시간대 별로 할 일들이 들어있고, 그 시간에는 오롯이 그것에만 집중한다.
지키기 어렵긴 하다. 하지만 여러 일을 해 나가기에 이만한 방법은 없다.
그렇게, 오후 다섯 시, 미션 클리어 된 계획표를 보고 흐뭇하게 외친다. 하루 루틴 완료.
무엇보다, 업무를 대할 때 늘 다짐한다.
적어도 쪽 팔리지 않게 하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대신하는 만큼 더 가치 있게 쓰자.
그래서일까. 복직 후 성과 평가도 나름 잘 받고, 힘들다는 승진도 했다. 최근에는 주요 프로젝트도 맡아 꽤 인정받고 있다.
가장 좋은 건, 육아 바톤터치를 위해 정시 퇴근 하더라도 떳떳하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점이다. 그래도 할 일은 엣지 있게 하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갖고서 말이다.
물론, 정시에 일어서는 것 만으로도 콩알만큼 눈치가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집에 돌아오면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주는 아이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반긴다. 이 작은 인간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할 시간이다. 일과 운전으로 녹초가 되어 버린 상태라 짜증과 화가 훅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때마다 떠올린다.
바로, 그, 출퇴근 길에 우아하게 들은 육아 노하우들을 말이다.
이런 생활을 해 온지 어느덧 5년이다.
어느 때 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으며 어른인데도 여전히 자라나고 있는 느낌이다.
때로는 할 일들이 버거워 진다. 무엇보다 새벽에 일어나 회사 가지 말라며 부스스한 얼굴로 훌쩍이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무너진다. 이렇게 아둥바둥 사는 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뭣이 중한디’ 를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답은 내리지 못한 채.
하지만 안다. 나라는 사람은, 루틴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에서 얻은 나름의 성취감이 에너지가 된다는 걸을. 그리고 이러한 생활에서 얻는 것이 분명 많다는 것을.
누군가 그랬다.
바쁘면, 하지 못하는 것들을 아쉬워 하며, 새로운 것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 한단다.
바쁘지 않으면, 시간이 많다 여기고 늘어지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단다.
내 얘긴 줄 알았다.
어쩌다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 인터넷 속을 떠다니다 처진 눈꺼풀로 저녁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오늘도 새벽 다섯 시, 책 한 페이지와 함께 하루 루틴을 시작한다.
매일 매일 애쓰는 영리한 삶을 이어가기 위해.
스스로 한 이 협상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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