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아직 이불속에 머물고 싶은 정신을 육신의 힘으로 끌어당기며 속으로 되뇐다.
"오늘 하루가 시작되었음에 감사합니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뽀얀 거품을 만들며 화장실 벽에 붙여 놓은 종이에 시선을 옮긴다. 아직 초점을 찾지 못한 흐릿한 눈으로 글을 읽어 내려간다.
'오늘도 즐겁고 기대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나의 하루를 좋은 습관으로 채우고 있다.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
2개월 전, 자기 계발서를 읽다 꽂혀서 시작한 아침 확언이다.
꾸역꾸역 출근 준비를 마치고 흰색 테이블 앞에 앉는다. 분홍색 수첩을 펼치고 분홍색 볼펜을 집어든다.
지금 이 순간 감사한 것 3가지, 좋은 하루를 만들기 위한 다짐 3가지, 나에게 해 주는 긍정의 말을 적는다.
'이렇게 감사 일기를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나를 생각해 주고 아껴주는 가족이 곁에 있음에 감사하다. 매일 출근할 수 있는 회사에 다닐 수 있음에 감사하다.'
'물을 5컵 이상 마시고, 책을 3장 이상 읽고, 나에게 잘했다고 말해주면 좋은 하루가 될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
1년 동안 적어내려간 감사일기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을 쓸 때도, 두 달 동안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기특하게도 최근 3개월 간은 매일매일을 채워나갔다. 늦잠으로 지각 할 것 같은 날은 수첩을 가방에 넣어 출근했다. 손으로 직접 적어낸 형체들이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떠올라, 회색빛 마음을 조금씩 걷어내준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권의 노트를 채워갈 때 즈음, 어느새 감사 회로가 나도 모르게 켜지는 신기한 일들을 경험했다.
#1
출근 전, 야채즙을 꺼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동그란 물체들이 후두득 하고 떨어졌다. 뭐지? 불을 켜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맙소사. 날달걀 세 개가 바닥에 시원하게 깨져있었다. 어제밤 남편이 아침에 가져갈 달걀을 삶아준다고 했는데, 판을 잘못 넣어뒀던 거다.
'에이씨'. 처음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곳곳에 퍼져있는 끈적한 날달걀을 닦아내는 동안, 이상하게 화라는 녀석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스스로도 놀랄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휴, 머리로 안 떨어져서 다행이다. 이김에 바닥이랑 냉장고 닦는 거지. 어차피 좀 늦은 거, 느긋하게 출근하자. 오히려 잘됐어. 그래도 나 챙겨주는 남편이 있어서 좋구먼.'
#2
퇴근길. 유독 사거리가 많다. 첫 신호에서 빨간불이 걸리면 매 거리마다 5분 이상씩 기다려야 한다. 집까지 걸리는 시간이 20분은 족히 길어진다는 말이다.
옆 차가 갑자기 끼어든 탓에 첫 번째 사거리 빨간 신호에 딱 걸린 날이었다. '아, 놀래라.' 앞에 보이는 빨간 라이트를 노려본 것 도 잠시, 도착해서 먹으려고 사둔 샌드위치가 떠올랐다.
'배고팠는데 잘됐다. 덕분에 한 입이라도 더 빨리 먹게 됐네. 고맙다.'
#3
두 아이가 말다툼을 하자 서로 예쁘게 말하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근래에 말대답이 강해진 둘째 아이가 성질을 부리며 아무 말 대잔치를 시작했다.
'엄마나 예쁘게 말해, 엄마도 화냈잖아, 엄마한테 배운 거야.' 등과 같이 속 뒤집어지는 말들이다.
예전 같았으면 부글거리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일그러진 표정으로 괴성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달라져 있었다. 오히려 당시의 상황과는 반대로 마음이 잠잠해지더니 아이의 감정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는 나조차 놀라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제 좀 컸다고 말대꾸를 하네, 대들려고 얼마나 저 머리를 굴리고 있을까. 아이고, 쪼끄만 게 귀엽고 가소롭다. 저 녀석 속도 속이 아닐 텐데, 내가 잘못한 건 없나. 나도 앞으로 더 조심해야지.'
감사하는 마음은 습관이 된다고 했다. 습관은 적어도 100일 이상은 매일 행해야 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들었다. 사실이었다.
아침확언이나 감사일기는, 둥이 육아에 회사까지 다니느라 피폐해진 '나'를 보듬어 주기 위해 시작한 행동이었다. 긴장과 화로 가득 찬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에서 불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온전해야 아이들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부모의 화가 아이 정서에 악영향을 미친 다기에, 이를 악 물고 참아내기만 했다. 아이들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부들부들 떤 적도 있었다. 그럴수록 내 속은 더 심하게 곪아가기만 했었다. 아이들이 차라리 화를 내라고 훌쩍이며 말한 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