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목요일. ‘이렇게 회사 다니는 것 맞나. 고민해 보자.’
4월 3일 월요일. ‘요즘 들어 출근하기가 너무 힘들다. 방법이 없을까.’
5월 2일 화요일. ‘벌써 몇 년째이니, 이제 그만 정리 좀 해보자.’
6월 1일 목요일. ‘또 한 달이 지났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뭘까.’
매월 워킹데이의 첫날, 회사 다이어리의 월력 페이지를 펴고 그 달에 할 일과 중요한 마감일을 표기한다. 그리고, 옆쪽 빈 공간에 내 생각을 한 줄씩 끄적여 두곤 한다.
작년만 해도 ‘잘하고 있어, 이번 달에는 이 일을 꼭 마쳐보자.’와 같은 열정을 외치는 문장들이 간간이 보였는데, 올해는 온통 회사에 대한 고민과 불만들이 반복적으로 적혀 있다.
페이지를 앞뒤로 넘겨가며 힘없이 축축 처진 글자들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육아휴직에서 복직 후 만 6년 동안 매일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물음표 하나가, 회사를 계속 다닐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것 아니었는가.
세상에, 그 고민을 하며, 수년간 하루 여덟 시간씩 일을 해왔다니, 같은 질문에 시달린 스스로가 불쌍하고 안쓰러우며 화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했다. 고민의 꼬리를 이제 그만, 제발, 잘라 버리고 싶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프린터 옆에 있는 A4 용지 한 장을 갖고 왔다. 책상 위에 반듯하게 펼치고는 연필 하나를 쥐고, 떠오르는 질문들을 적어 내려가 보기 시작했다.
돈은 벌어야 하는가?
그렇다. 코로나 이후 남편의 벌이가 녹록지 않다. 생활비, 관리비, 학원비 등을 모두 내가 번 돈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럼, 회사 말고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고 싶은데, 아직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 지, 그걸로 수익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케이. 그럼 지금 돈 벌 수 있는 곳은 회사 한 곳인 걸로.
그나저나 회사 다니는 건 견딜 수 있나?
그렇다. 예전에는 사람 때문에 불면증이 올 정도로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다. 상사도 동료도 팀원도 모두 호의적이다. 일은...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15년 전 입사 후, 약 8년 간은 새로운 일을 맡고 인정과 승진이라는 달콤한 당근을 씹어 먹으며 성실하게, 큰 어려움 없이 다녔었다. 일이 많아 힘들다, 정도의 생각이 전부였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이후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었다. 아이를 두고 회사를 다니는 것이 맞나, 그동안 쌓아온 경력이 그저 아쉬워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와 같은 류의 고민들이었다.
하지만, 막연하게 뒤엉켜 있는 질문들을 종이에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가다 보니, 질문은 단 한 가지 맥락으로 이어졌다. '돈벌이의 유무'.
시간이 흐르고 주변의 환경과 상황이 달라지면서, 고민할 이유가 사라졌다(어쩌면 잠시 흐릿해진 것일지도). 가계 살림을 위해, 무조건, 다녀야 하는 것이다.
속으로 허탈하게 하하 하고 웃어버리고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던 찰나였다.
얼마 전 자기 계발 아티클에서 본 글이 책상 위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떠올랐다.
‘사람은 하루에 무언가를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뇌용량이 한정되어 있다. 선택을 최소화하라. 그리고 여유분을 보다 생산적인 곳에 써라.’
루틴을 정해두고 디폴트, 즉, 기본 설정값으로 반영해하여 자동화시키면, 하루를 더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이불 정리를 하고, 정수 한 컵 마신 후, 글을 쓴다.라는 식의 일상이었다.
가만있어보자.
회사에 다니는 것도 이제 나에게 기본 설정값 아닌가. 하루 중 꽤 긴 시간이지만 루틴으로 생각하자. 그렇게 해 버리자.
다이어리의 7월 월력 페이지를 펴고 가장 잘 나오는 볼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비장하게 꾹꾹 눌러 적어 내려갔다.
“회사는 이제 너에게 디폴트 값이다. 루틴이다. 그리고 그 고민할 시간에 더 의미 있는 일을 하자.”
위 문장을 적고 나서, 명치에 걸려있던 뭔가가 쑤욱 내려가는 듯했다.
갑자기 노트북의 화면이 더 또렷하게 보이고, 팀원들의 얼굴이 이쁘게 보인다. 심지어 상사의 목소리도 그리 불쾌하지만은 않다.
오늘부터 회사일은, 생활에 있어 필연적인 것이라 여길 것이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는가. 뭣하러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해 고민하고 불평하고 있었던 것인가. 집중해서 제대로 일하자. 같은 고민이 불쑥불쑥 올라오겠지만 뿅 망치로 쾅쾅 쳐서 일단 내려보낼 것이다.
출퇴근과 점심시간에는 내가 좋아하면서 잘하는 것을 찾아보자. 좀 더 치열하게 시간을 쪼개서 사용해야 하겠지만, 바지런하게 움직여 보자. 고민에 쓰던 용량을 여기에 써보자.
엉망징창 의식의 흐름대로 내린 기준이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마음만은 편하다.
책상위에 놓인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다이어리에서 일력 페이지를 펼쳐 오늘의 할 일을 적어본다.
아침에 팀 업무 미팅을 하고, 현장에 있는 팀장과 논의하고, 점심엔 1인 회의실에 들어가 책 몇 페이지라도 읽어보자. 오후는 나른할 테니 지난주 회신하지 못한 메일 정리 좀 하고, 보고할 것들도 나열해 보자. 퇴근길에는 음악 좀 듣다가, 글감을 떠올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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