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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Jul 12. 2024

직속 상사가 바뀌던 날

김 팀장의 준비


세 달째 공석이었던 임원의 자리가 채워졌다.

나의 상사가 또다시 바뀐 것이다.


그간 내가 모셨던 상사는 내가 신입 시절 때부터 가까이에서, 그것도 같은 부문에서 보아왔던 분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일에 있어 급한 성향 인 지, 디테일에 집중하는지, 혹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등을 훤히 알고 있었다. 상사들 역시 나의 일하는 스타일은 물론 장, 단점까지 파악하고 계셨다. 덕분에 함께 일을 할 때면 어렵지 않게 합을 맞추어 갔었다. 어쩌면 10년 가량 매일 보아온 분들이라 서로를 향한 단단한 신뢰가 쌓여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부임한 상무님은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같은 인사 업무에 몸담고 계셨지만, 사업장이 다른 곳이었다. 상무님은 현장, 나는 본사. 말 한마디 새로 섞어본 적 없는 분이었다. 상사가 바뀔 마다 평온함을 유지했으나 이번만은 유독 긴장이 되었다.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몇 가지 되지 않았다. 합리적이며 의사결정이 빠르다는 긍정적인 의견도 있었으나, 담배와 술을 즐기며 여자 직원과 일하는 것을 어려워하신다고도 들었다.


남자 팀장들과 두세 시간에 한 번씩 우르르 담배 피우러 올라가는 풍경이 또 다시 펼쳐지겠구나 싶었다. 술자리에서 두텁게 쌓이는 관계들이 눈앞에 훤히 보였다. 게다가 여자 직원의 대화를 어려워 하신다니, 여자팀장으로서 막막함까지 더해졌다.






새로운 상사가 오신 첫날.

부문장이 팀장들을 모아놓고 인사를 시켜주셨다. 부문장님은 일전에 나를 따로 불러 새로 부임할 분에 대해 귀띔해 주신 적이 있었다. 본인이 5년 넘게 보아왔는데 굉장히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이라 일하기 훨씬 좋을 거라고, 또한 예전처럼 남자들만 감싸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미팅 룸에 빙 둘러 서서 웃는 얼굴로 서로를 반갑게 맞이했. 문장님은 자신의 부하직원이 된 상무님을 흐뭇하게 바라보셨고, 상무님은 팀장 한 명, 한 명 눈 맞추며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다.

팀장들의 모습은 가지각색이었다. 과거 함께 일했던 남자 팀장 한 명은 허허 웃기만 하는 것이 매우 편안해 보였다. 다른 남자 팀장은 언젠가 티브이에서 본 군대 속 이등병의 모습처럼 뻣뻣하다 못해 굳어져 버린 듯했다. 머지 팀장들은 얼굴에 억지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볼펜을 꼭 쥐고 있나 머리를 긁는 모습에서 긴장감이 고스란히 껴졌다.


팀장들과의 어색한 상견례를 마쳤으니, 이제 부서 직원들 모두와 인사할 차례다. 상무님과 팀장들이 부문의 가장 넒은 공간 한켠으로 어슬렁 어슬렁 이동했다. 마치 왕과 그를 보좌하는 신하들 처럼.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던 직원들 중 일부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서 50여명 가량 되는 모든 부문원들이 일어나 왕과 신하들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섰다. 


상무님은 갑자기 많은 인원들의 시선을 한 번에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적이 바이브레이션이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 반갑습니다. 앞으로 팀 별로 돌아가면서 천천히 인사하도록 할게요. 일들 하세요. 허허."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공,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손, 억지스레 미소짓는 표정을 보며, 이 분도 우리 못지않게 어색해하시구나 싶었다. 

상무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직원들은 기계적인 웃음과 함께 인사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왕과 신하들은 각자의 자리로 걸어 들어가 평소와 같이 노트북 화면을 켰다.





그때부터였다. 나에게 이상하리만큼 고요함과 침착함이 찾아온 것은.

머릿속에서 할 일들이 차곡 차곡 떠올랐다.

 

자, 지금부터 이 분이 나의 상사다. 상무님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게 나의 역할이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어떤 분 일지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자. 무엇부터 해야 할까. 그래, 일단 우리 팀 일을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팀의 역할과 업무들을 정리하자. 그래야 관심을 더 많이 갖게 되실 거다. 


자리에 앉아 폴더를 열고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상무님이 우리 팀 업무를, 우리 팀원들을 최대한 빠르게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문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연간, 분기별, 월별, 주별 업무들을 쭈욱 나열하였다. 미뤄지고 있는 업무들도 포함했다. 최근 CEO에게 보고된 자료들도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도록 정리해 두었다.


그 사 두 남자 팀장들은 상무님과 담배를 태우러 두 어번 다녀왔다. 농담들도 나누었는지 내려오는 길에 허허 웃음 소리까지 들렸다. 솔직히 신경이 쓰였다. 많이 거슬렸다. 또다시 남자들과 담배와 술, 그 속에서 오고 가는 정보들의 향연이 시작되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않는 척했다). '언제나 그렇듯 적절한 대화와 일로 승부하면 된다. 그럼 된다.' 라고 되뇌면서.






그날 오후, 우리 팀 차장님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셨다. (나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나 또한 의지하는 분이다) 상무님을 모시던 이전 팀장님에게 전화 한번 드려보라는 조언이었다. 상무님의 일하는 스타일이나 성향에 대해 팁을 얻어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질색하는 일인 건 알지만 그래도 눈 딱 감고 한 번 여쭤보란다. 이전 팀장님이 워낙 쿨하고 친절하시니 물어보면 잘 알려 주실 거라는 말도 더했다. 


자리로 돌아와 한참을 생각했다. '진짜 그래야 하나, 아, 정말 하기 싫은데.' 

그야말로 내적 갈등이 소용돌이치는 순간이었다. 괜한 자존심이 그렇게 까지 할 필요 없다고 외치는 듯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상사와 우리 팀원 사이에 다리 역할을 잘하는데, 상사에 대한 기초정보가 큰 도움이 될텐데, 그깟 자존심 좀 내려놓아도 될 텐데... 


의자에서 엉덩이를 몇 번이나 들썩이다가 턱 한번 꽉 물고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핸드콘 숫자 키패드를 누르는데 손가락이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전 상사가 어떤 스타일인지 물어보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아휴.


통화가 연결 되자마자 평소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부장님, 통화 잠깐 괜찮으세요? 신입사원 교육 관련해서 여쭤볼 게 있어서요."

"네~ "


"기존에 과목을 바꿔서 전사적으로 통일되게 하면 좋겠는데, 어떠세요?"

"아~ 지난번에 실무자 통해서 얘기는 들었는데,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네~ 그리고 부장님, 뭐 하나 여쭤볼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아, 아니에요."

"뭔데요, 말씀하세요. "


"아, 저기... 상무님 업무 스타일이 어떠세요? 보고 받으시거나 할 때요."

"아~ 상무님이요? 일단 아주 격식을 차리거나 그러시진 않고요. 일단 자리에 계실 때 자료를 먼저 갖고 들어가세요. 그런데 엄청 꼼꼼히 보실 때가 있어요. 팀장님이 그 내용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을 하고 들어가셔야 하는 거지.."


"아, 네.. 그럼 이메일보다는 대면 보고를 더 편해하세요?"

"네, 맞아요. 대면 보고 드리고, 자료 필요하면 달라고 하실 거예요. 그때 드리면 돼요."


"팀원들하고는 직접 보고 받으시거나 하세요?"

"아니요, 낯을 좀 가리셔서, 대부분 팀장들하고만 일을 하세요. 그러니까 팀원들은 데리고 들어가지 마세요. 그게 팀장님이 편할 거예요."


"네.. 감사해요, 팀장님, 사실, 이런 거 잘 여쭤보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잘 모르는 분이 상사로 오신 적은 처음이라, 눈 딱 감고 전화드렸어요."

"하하. 잘하셨어요, 괜찮아요. 언제든지 또 전화 주세요. 그리고, 팀장님. 그거 아세요? 다른 팀장들도 다 전화했어요. "


"아, 그래요? 하하"

"그런데요, 다른 팀장님들은 이런 거 하나도 안 물어봤어요. 의전 어떻게 하는지 물어봤지, 담배는 언제 언제제 피우러 가시냐, 술은 얼마나 좋아하냐, 야근은 하시냐 등등. 그런데 팀장님. 상무님은 의전 이런 거 중요하게 생각 안 하세요. 일로 평가하시는 분이에요."


"아 하하.."

"궁금한 점 있으시면 또 전화 주세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전화 해보길 잘했다. 

이전 상사와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메일보다는, 대면 보고한다는 점이 특히 중요한 포인트였다. 어렵게만 보였던 상무님이 조금은 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남들에게 들었던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걱정과 오해만 하고 있는 것보다 수만 배는 나았다.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의전이 그리도 중요한 것일까? 중요하니 다들 알아보는 거겠지? 아무래도 비위를 잘 맞추며 같이 담배 피우고 술 마시면서 시간을 더 갖게 되고, 그만큼 관계도 가까워질 테고, 말도 더 잘 통할 거다. 그럼, 그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일을 분배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 그 '관계'가 일정 부분 차지할 것이다.






그동안 남자 임원을 모셔왔기에,  더욱 일로 승부해 왔었다. 하고 있는 일을 더 자주 업데이트 하고 들이밀었다. 자연스러운 웃음과 편안한 대화까지 장착하고서 말이다.


이번 상사는 의전을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게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을 것이다. 나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팀원에게 더 마음이 가니까. 사람이라면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라는 걸 아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듯 회사와 일을 향한 내 진심을, 나의 상사가 일을 올바르게 잘하시도록 돕고자 하는 이 마음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잘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해, 우리 팀을 위해.

하나하나 해 나가 보자.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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