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유 Jul 12. 2024

김팀장. 김팀장. 김팀장!!


바쁘다.

올해 들어 가장 바쁘다.

아니 2023년까지 통틀어서 제일 바쁘다.


직속상사로 상무님이 새로 부임하셨다. 그와 동시에 보고 건수가 여기저기서 뻥뻥 터진다. 전무님은 상무님에게, 상무님은 나에게 그 터지는 불꽃들을 휙휙 던져주신다. '김팀장! 받아!!' 하고 말이다.

훅 받은 그 불꽃들은 꺼지기 잔에 착착 보기 좋게 한 곳으로 모으고 어여쁘게 색도 입혀서 넘겨드려야 한다. 그러는 사이 몇몇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튀어댄다. 덕분에 바알간 색을 띠게 된 눈으로 마무리 지은 보고서를 상무님께 드리면 드디어 끝. 이 아니고 다른 불꽃이 다시 던져진다. 김팀장!!이라는 카랑카랑한 소리와 함께.





한 달 전, 평화롭던 나의 아침 루틴은 이러했다.

아침 6시 반 정도 회사에 도착한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책상 아래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열 개의 발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앞코가 넓은 녀석이다.

이후엔, 가방에서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 복도 쪽 화장실로 향한다.  아침에 급히 한 초벌화장 위를 완벽한 메이크업으로 덮기 위해서다. 새벽 시간에는 전용 화장대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넓고 쾌적한 거울과 잡티를 낱낱이 보여주는 밝은 빛도 있다.


한결 예뻐진 얼굴로(자기만의 만족) 자리로 돌어 온 후, 전날 닦아둔 머그컵과 함께 탕비실로 걸음을 옮긴다. 따뜻한 물에 홍삼 한팩 쭈욱 짜서 넣고는 집에서 가져온 통밀빵을 미니 오븐 안에 올린다. 견과류와 같이 먹으면 그야말로 고소짭짤한 최애 빵. 입맛 없는 아침에 먹기에 딱이다.

홍삼의 건강한 기운이 몸을 감싸고 허했던 뱃속이 든든해 질 때 즈음 시계는 일곱 시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그때부터 다이어리를 펴 하루의 일과를 계획하고 본격적인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 주 나의 이 모든 루틴들이 무너져 버렸다. 마치 아슬하게 서로 붙어 있던 유리창이 갑자기 내려앉듯이 와장창창!


상무님이 나타나신 이후부터였다.

상무님은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 편이다. 아침 7시 20분 정도. 그리고 바로 일을 시작신다. '정식 근무시작시간은 여덟 시인데 그때부터 일을 하시면 언될까요?!' 라고 묻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부르신다.

"김 팀장! 이거 자료 좀 출력해 줄래요?"


또다시 부르신다.

"김 팀장! 지난번에 말한 게 뭐였죠?"



으. 같은 인사 업무를 하셨으나 영역과 범위가 달랐다. 한창 업무 파악을 하실 시기에 유난히 새로운 안건들이 우루루 쏟아졌다. 그러니 모르는 정보가 있을 때마다 질문과 자료 요청을 수도 없이 하시는 거다. 본인도 상사께 보고를 드려야 하니, 스스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정리된 문서가 필요하시긴 할거다. 속으론 이해하려고 했다. '참, 애쓰신다. 상무님도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고달프실 것인가.'라고 몇 번을 되뇌었다.

일이 너무 많으면 팀원들과 같이 하면 되는 거 아니냐 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팀원에게 불똥의 꼬다리라도 넘겨주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으랴. 허나, 나 조차 이해하지 못한 업무를 소중한 팀원들에게까지 쥐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향이 수시로 바뀌니 혼자 하는 게 낫겠다 싶은 이유도 있다.





사무실에서만 5 천보를 걸은 날도 있다. 마치 내 머리 위에만 비가 쏟아지는 듯 미팅도, 상무님의 호출도 넘쳐났다.


점심 먹고 양치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있을 때였다. 칫솔을 입에 넣고 어금니 한번 쓱 문지르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상무님이다. 흐르는 물에 칫솔을 대충 닦아내고는 입안의 치약을 퉤 뱉은 채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 마냥 전화를 받았다.


"네, 상무님."

"잠깐 자리로 올래요?"


치약이 하얗게 묻어있는 칫솔을 세면대 어딘가에 던져놓고는 화장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슬리퍼를 신고 있었기에 유독 소리가 났다. '드득! 다다닥!'. 게다가, 그날따라 왜 그리 통이 큰 바지를 입었는지. 독서실처럼 고요한 사무실에 펄럭이는 소리가 사무실 안을 채웠다. 국기가 세차게 휘날리듯 말이다. 그날 난 속으로 외쳤다.

 

'대한독립만세가 아니라 나의 독립을!! '


빛의 속도로 달려서 도착한 자리에서 노트와 볼펜을 집어 들고 상무님 자리로 향했다. 상무님은 헉헉거리는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슬쩍 쳐다보시더니 가볍게 한 마디 던지셨다.


"지난번에 이거 작성했던 거, 기준을 좀 바꿔보자고 하시네. 이렇게 한 번 더 작성해 볼까?"


으, 벌써 몇 번째 인가. 얼마 전, 버전 20까지 작성했던 보고서의 공포스러운 기억이 스물스물 몰려왔다. 입안에서는 채 헹궈지지 않은 치약이 거품이 되어 뽀글뽀글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프로라면 감정을 드러내선 아니 된다. 금방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네!'를 외쳤다. 입안의 거품과 짜증스러움을 함께 꿀꺽 삼키고서.




아침 루틴이 무너지고 나니 매일 아침 홍삼은 커녕 10시가 될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다. 목이 마르다는 느낌이 십 분에 한 번씩 들지만 탕비실에 다녀오는 시간마저 내기가 어렵다. (어쩌면 그 정도는 다녀올 수 있을 텐데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도 거울 한 번 볼 틈조차 없었다. 눈을 꿈뻑이며 저절로 빠지기를 기다릴 뿐.

고소한 빵과 견과류는 아침에 넣어둔 가방 속에 그대로 있기 일쑤였고 초벌화장에 립만 쓱 바른 채로 책상에 앉아있는다. 다이어리는 뭐.. 이주일 째 공란이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너무 편하게 일했왔나 싶다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래도 화장실 갈 시간은 있어야지, 요즘 너무 바쁘긴 하다. 또 다시 내 몸 망가지는 지도 모르고 일이 최우선 되는 스위치로 제쳐질까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면서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적도 있었으면서.



생각해 보면, 원래 회사생활이라는 게 그렇다.

어쩔 때는 일이 너무 없어서 미칠 듯이 지루하고 무료해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그보다 더 미칠 정도로 바빠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기도 한다.


책상 위에 앉은 먼지처럼 후 하고 불면 그만인, 있는지도 모르고 없어져도 모르는 가치 없는 존재로 느껴지다가도 나 없으면 이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아이러니 함이란.


입사 20년째. 이 바쁨과 힘겨움이 계속되지 않을 거란 걸 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속으로 되뇌며 생각해 본다.



'이런 날도 저런 날도 있는 건데 뭘 이리 당황하는가. 잠시 그러는 거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그럭저럭 괜찮아질 것이다. 멘탈 꽉 잡고, 이 세찬 바람을 일단 슬기롭게 뚫고 지나가 보자.'


아자.




*사진출처 - pixabay




이전 03화 직속 상사가 바뀌던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