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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Oct 14. 2024

이 일은 나에게 어떤 가치를 주고 있나요?


어느덧 15년이 훌쩍 넘었다.

한 사람이 회사에 발을 딛고, 성장하고, 떠나는 날까지의 모든 '직원'과 관련된 일을 하는 곳. 인사팀에서 몸을 담은 지.

이곳에서 나는 운 좋게 일 잘하는 선배들을 만나 일머리를 배웠으며, 남 부럽지 않게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지금은 팀을 관리하는 팀장 역할까지 맡고 있다. 때로는 온몸을 짓누르는 업무량으로 허덕이지만, 간혹 사람과 부딪히며 얻은 스트레스로 잠 못 이루지만, 여기서 일의 가치를 깨달은 후 진짜 내 업으로 여기며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인사팀은 나의 첫 부서는 아니었다. 일종의 도피처로 선택했었다고 할까.

입사 후, 3개월 간의 연수 끝무렵, 배치면담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곳에서 인사팀에 근무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마케팅 일을 하고 싶다고 끈질기게 주장했었다. 대학 전공을 살리고 싶은 의지가 컸고 재미있게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자신감인 지 모르겠으나 일종의 천직이라고 여겼었던 것 같다. 아마 취업에 성공한 성취감으로 뽕이 잔뜩 들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다고 자만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고집대로 배치된 마케팅팀에서 나는 날개 단 듯 신나게 일을 했을까.

아니었다.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림 그리는 작가로 비유하자면, 이젤 패드 앞에 앉아 우아한 데생과 아름답게 붓질하는 모습을 상상했으나, 실제는 바닥에 엎드려 양손에 흑연을 잔뜩 묻힌 채 지우게 질만 열라게 해대는 그런 모습이었달까.

데이터 분석과 시스템 입력 등의 일이 되감기 하듯 무한 반복 되었다. 무술을 연마한다 여기고 이곳에서 2년, 3년 이 시기를 견뎌낸다면 입사할 때 상상하던 이상적인 일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아니었다. 경력이 꽤 되어 일 하나씩 꿰차고 있는 대리님, 과장님들을 보아도 기대했던 그런 업무는 10에서 1만큼도 하지 않고 계셨다. 마케팅 팀을 고집한 내 의견이 오판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무슨 일을 해도 지루하고 괴롭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팀에서 전배 제의가 왔다. 2년 동안 허우적 대던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밧줄 하나가 내려온 것만 같았다. 썩은 동아줄인지 금 동아줄인 지 재 보지도 않은 채 일단 잡기로 했다. 인사팀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지했는데도 말이다.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만이 절실히 앞섰었다. 마케팅 부문이 아닌 다른 곳의 업무를 늦기 전에 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2년간 지우개 질로 갈아 넣은 나의 시간과 노력을 미련으로 남긴 채 직무를 옮기게 되었다.




인사팀에 발을 딛었을 때는 입사 3년 차 되는 시점이었다. 3년이라.. 지금도 그러한 지 모르겠으나, 20년 전에는 333이라는 마의 숫자가 존재했었다. 입사 후 3주, 3개월, 3년이 고비라고. 3주는 회사에 단순 반복 업무가 존재함을 인식하는 기간, 3개월은 정신없이 배우다가 정식으로 일을 맡아 헤매는 기간. 3년은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해져 무료함이 시작되며, 이직이라는 단어에 스을쩍 눈이 돌아가는 기간을 말한다.


나에게도 마의 3년은 정통으로 휘몰아쳤다. 새로운 일을 배우긴 했으나, 재직자 데이터 추출, 퇴직률 분석, 자료 출력 등 단순 업무는 이전 부서와 다를 바 없었다.

일상이 무료했다. 어깨와 입은 나란히 시옷자를 하고는 주어지는 일만 '쳐내다' 퇴근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문득, 매일 여덟 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한다는 생각이 훅 떠올랐다.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내 금 같은 시간이 미치도록 아까워졌다. 직무도 바뀌었고, 분명 다른 재미를 알아갈 수 있는 환경인데, 매너리즘으로 다시 빠져들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모니터에 띄워진 엑셀의 피벗 함수를 이리저리 기계적으로 돌리던 손가락을 일단정지시켰다. 그리고 질문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이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을, 그리고 어떤 가치를 주고 있는가?'



신기했다.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자 평소에 하던 모든 일을 '그냥' 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인사 정보를 하루 종일 분석하면서도, 수십 장의 보고서를 복사 뜨면서도 질문이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질문에 답을 하려다 보니, 일의 의미를 찾으려다 보니 지루함조차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무실 한쪽 벽면에 위치한 사내 TV 화면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팀, 인사 팀장님이었다. 멀리서 흘끗 쳐다보니 평소와는 달리 정갈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계셨다. 주변에는 같은 부문 직원들이 TV 앞에 모여 호호대고 있었고, 팀장님은 부끄러우신 지 자리에 앉아 커피만 들이켜셨다.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들을 정리하던 나도 화면 가까이 발걸음을 옮겼다. 자세히 들어보니 인사제도를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경력 개발 프로그램'.

직원의 경력이나 역량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승진, 전배에 대한 거처와 지원이 필요한 점을 상사와 논의하는 제도이다. 입사 때부터 알고 있었고, 심지어 나도 3년 동안 양식을 작성하고 나의 매니저와 미팅도 했던 그 프로그램이었다. 매우 형식적으로 느껴졌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으며 말 그대로 대충 형식적으로 넘겼던 자리였다. 그런데, 인사 팀장님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홍보하는 그 영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머릿속이 환히 밝혀지는 게 아닌가?


'아, 인사라는 조직은 사람들이 잘할 수 있는 업무를 찾아주고, 그 안에서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는구나. 참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럼 나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참 보람을 많이 느낄 것만 같다.'라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몽글몽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평소에 늘 해오던 잔업들이 달리 보였다. 숫자를 분석할 때도, 파워포인트의 줄 간격을 맞추면서도, 시스템에 수십, 수백 명의 입사발령을 입력하면서도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가 무엇인 지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5년, 10년, 그리고 지금까지 성과관리, 승진, 제도, 채용, 교육 업무를 맡으면서 늘 머릿속에 되새겼다. 직원들에게, 회사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들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그러다 보니 기존의 업무를 개선하거나 새로운 일을 기획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자연스럽게 승진과 보상도 따라왔다. 매 순간 맡은 일을 즐기고 몰입하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성장시켜오고 있었던 것이다.  






인사부서에서 팀장을 맡은 지 수년이 지나니 신입, 경력사원 채용 면접관으로 종종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그중 신입사원 채용 면접관으로 자리할 때면 20년 전 과거의 내 모습을 마주하곤 한다. 긴장과 설렘이 가득 베인 몸짓, 무엇이든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묻은 목소리.

그들이 진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도록 던지는 질문 하나가 있다.


첫 번째는, "저희가 후보자님을 채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이다. 이 질문은 다음에 대한 포석이라고 봐도 된다.

그럼, 입사 지원자는 기다렸다는 듯 반가운 기색을 비치며 자세를 고쳐 앉고 답을 한다. 예상했던 바였는 지 마치 녹음기를 켜놓은 것 마냥 매끄럽게 말을 잇는다.


"제가 이곳에 입사하면 이 회사의 가치인 신뢰, 혁신, 협업을 이루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이전 인턴십에서 맡았던 마케팅 기획과 홍보 경험을 살려 매출을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앞의 이력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저의 끈기와 책임감으로 무슨 일이든 끝까지 해 내겠습니다. 그리고..."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다가, 준비한 내용이 모두 전해진 것을 확인한 뒤, 이어서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그럼, 이 회사에 입사하는 게, 후보자 님께 좋은 점이 무엇인가요? 어떤 가치를 주나요?"



어떠한 질문이든 자신 있게 받아 칠 것만 같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지원자의 눈빛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눈동자를 왼쪽, 오른쪽으로 굴리다가 뭔가 말을 하지만 이내 얼버무리기 일쑤다. 어떤 이들은 잠시 시작할 시간을 달라며 옆 사람에게 순서를 넘기기도 한다. 답변을 하는 분들도 결국 회사에 기여하겠다는 내용으로 결론을 짓는다.


취업난이 심해서, 어떻게든 어떤 회사로든 취직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기에 미처 내가 회사를, 직무를 고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입사 면접 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더라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더라도, 나중에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꼭 답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직장인은 하루에 여덟 시간을 근무합니다. 점심 식사 한 시간과 출퇴근 평균 왕복 두 시간을 합치면 총 11시간을 회사에서 생활한다는 것과 같은데요. 깨어있는 시간의 반 이상, 일 년으로 치면 약 8개월가량 동안 행하는 일을 '그냥' 하는 것은 너무 허무한 것 아닐까요.

취업 준비할 때의 그 치열함과 처절함 만큼 입사 후에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나에게 정말 가치 있는 일인가?, 나는 어떤 가치를 실현하는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는가?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말이죠.

많이 헤매지 않고 답을 꼭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답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요. 만약 가치를 찾지 못한다면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회사나 직무를 과감히 바꾸거나 직장인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나의 시간을 현명하게 제대로 사용하는 길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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